내일은 남편 생일이다.
1960년대, 어려운 형편에 뱃속의 아이를 낳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수술대 앞에서 너무나 무서워 도망치셨다던 시어머님의 아주 오래된 흑역사를 가끔씩 꺼내어 보며 추억의 상념에 빠져들던 남편도 벌써 중년이 되어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어머님은 막내 아들인 남편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찹쌀을 깨끗이 씻어놓은 커다란 바구니를 먼지 하나 들어갈까 애지중지 보자기에 곱게 싼 후 방앗간에 가셔서 직접 빻아 오셨다. 시아버님은 시력이 약한 어머님이 행여라도 넘어지실까봐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차로 방앗간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시고 되돌아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생일날, 저녁 무렵이 되면 곱게 빻아온 쌀가루에 달콤짭조름하게 익힌 팥을 겹겹이 흩뿌려 정성스럽게 떡시루를 앉히셨는데 시루떡이 고르게 잘 익어 떡 사이사이가 들러붙지 않고 서로 잘 떨어지면 아들의 1년 운세 역시 꼬이지 않고 잘 풀리는 것이라 여기시며 더욱 정성을 다하셨다. 옛부터 붉은 팥이 잡귀나 부정을 쫒는다는 의미를 갖고 액막이 역할을 한다고 전해지므로 마치 연례행사처럼 사방이 고요한 새벽녘에 깔끔하게 목욕시킨 장독대 위에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올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의식 아닌 의식을 치렀던 것 같다.
집 안에서 가장 환하고 좋은 자리에 깨끗한 물 한 사발과 함께 떡시루를 통채로 올려놓고 하얀 쌀을 담은 그릇 가운데에 쓰지 않은 새것의 초를 1시간 정도 태웠다. 나 역시 초가 타는 시간에는 온 마음을 다해 조금 더 경건한 자세로 정숙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정도 타고 난 촛불을 끌 때에도 다음 해까지 건강하게 잘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방정맞게 한 입에 훅 불지 않고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뜨거운 기운을 참아가며 슬며시 불꽃을 붙잡아 쉬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애쓴다. 식구들도 떡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남편의 생일 떡은 다음 날 직장에 가져가기도 하고 노인정에 나눠드리며 절대 버리지 않고 마지막 한 입까지 잘 챙겨먹었다.
그래서 우리집 서랍장 맨 구석에는 옛날 전기불 없던 시절에나 썼을 법한 기다란 양초들이 오랜 세월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참고로,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남편을 제외한 여섯 식구(시부모님, 며느리, 애들 셋) 생일에는 아주 간단하게 케익으로 대신한다.
시부모님과 함께 한 수 년 동안 그렇게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성의를 다해 시루떡을 하고 촛불을 밝혔었는데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이제는 더 이상 다시 보기 힘든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아이들도 모두 타지에 있어서 이번 생일에는 우리 부부 둘만의 조촐한 미역국과 함께 케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위해 몇가지 빵을 사서 그 위에 예쁜 초 하나 꽂으면 끝!
하지만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마음만큼은 앞으로 펼쳐질 남편의 모든 시간들이 술술~ 잘 풀릴 수 있도록 시부모님 몫까지 배 이상으로 기쁘게 축하해 주려한다.
매년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 곁에 오래 남아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고 알콩달콩 잘 지내며 건강하게 잘 살 수 있길 우주의 모든 신께 빌어본다.
퇴근 무렵,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 더한 진한 미역국을 정성스럽게 끓여서 어머님의 빈자리를 따스하게 메울 수 있도록 소고기 사러 시장에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