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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이와 여행

by 바람꽃

나의 남편은 막내로서 첫째 누님과 두 형이 있다.

형들은 우리와 가까운 광주에 사셔서 마음만 먹으면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시누이는 서울에 홀로 떨어져 지내신지 오래여서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게 다였다.

결혼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보다 10년 위인 시누이는 나의 고등학교 대선배이기도 했다. 약간 '센 언니'의 느낌도 있는데 예순이 넘었어도 밖에 나가면 '연예인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외모도 깔끔하시고 카리스마 넘치시고 야무지신 분이다. 특히,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나의 마음을 제일 많이 이해해 주시고 많이 위로해 주셨다.


서울에서 식당을 하셔서 항상 바쁘고 한번 내려오기도 쉽지 않을 만큼 여유가 별로 없으셨는데 2년 전,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는 꼭꼭 닫혀있던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안부도 자주 물으시고 조금 길다 싶은 연휴는 형제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 하셨다.

전에는 명절이나 시부모님 생신 때 겨우 만났었는데 이번 석가탄신일에는 휴일이 많아서 시부모님에 대한 추억도 곱씹을 겸, 시누이와 우리 가족이 함께 보내기로 하고 2박 3일 여행 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첫번째 일정은, 장성에서 해병 장교훈련을 받고 있는 막내딸을 데리고 경기도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을 만나러 화성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들이 외출 나오면 만나서 지하철을 타고 열심히 내려오고 있을 시누이와 조카를 데리러 지하철 역으로 간다.

아들과 조카는 아쉽게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근처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일찍 헤어졌다. 데려다 주는 길에 아들이 '아기 돼지 꿈을 꿨다'고 해서 복권도 나눠 가졌다.


연휴여서인지 가는 곳마다 교통체증이 심했다. 대전 근처에 숙소가 있어서 오후 내내 차 안에 묶여있다가 6시 쯤에 겨우 도착하고 바로 저녁 먹으러 나갔다.

날이 많이 썰렁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대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성심당' 빵집도 들렀다. 역시 소문처럼 대기 줄도 길 뿐만 아니라 빵집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늦은 시각이라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는데 빵을 한아름 골랐어도 생각보다 빵값이 쌌다. 맛은 물론이고 가격도 저렴해서 왜 유명한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활기찬 젊은이들이 가득한 시내 거리를 구경하고 오늘을 오래 추억할 만한 스티커사진도 찍었다. 지하 상가에서 옷도 고르고 악세사리도 득템하고 게임도 했다. 딸은 사격을 했다. 역시 해병답게 사격 솜씨가 일품이었다. 시누이는 평소에 보던 드라마를 못 봐서 아쉬워 했지만 ‘오늘 함께 보낸 시간은 절대 돈으로 살수 없다’고 쓴소리를 해줬다.


다음날 느즈막이 기상을 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근처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침 주차장에 차량이 많이 몰려 있는 국밥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여전히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이어져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큰아들이 멋있다고 추천해 준 ‘온빛 자연휴양림’이다.

충남 논산에 있는 개인 사유지라는데 부지가 어마어마하게 넓고 산등성이로 이어진 둘레길을 따라 맑은 계곡을 품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아들이 찍었던 멋진 장소에서 똑같이 사진을 남기고 만개한 철쭉을 비롯한 다양한 꽃들과 푸릇푸릇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며 낭만을 즐겼다. 골짜기를 따라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였는데 한바탕 헤엄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너무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얼핏 딱다구리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 깊은 숲속의 청아함과 상쾌한 공기를 뒤로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반야사'라는 절이다.

반야사는 대웅전 건물 하나 밖에 없는 조그만 절이지만 뒷쪽으로 들어갈수록 웅장한 돌산이 거인처럼 버티고 있고 그 안에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동굴과 함께 신비한 힘을 전해 줄 것만 같은 법당이 있었다.

하얀 입김이 보일 만큼 약간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는데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와 중생들의 기도와 소원을 비는 작은 촛대에 생명의 기운을 밝힌 정성들이 가득 모여 들어가는 입구부터 진한 향냄새와 따스한 온기가 넓게 퍼지는 것 같았다.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영면을 기원하고 우리 가족의 건강과 소원을 빌었다. 내일이 마침 석가탄신일이어서 가는 곳마다 오색등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다음은 반야사 바로 근처에 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로 향했다.

배우 김태리와 이병헌 주연의 역사드라마로 벌써 7년이나 지나서 셋트장 곳곳에 오랜 세월의 흔적만큼 녹이 슬어 있었다. TV에서 보았던 화려하고 아름답던 장면들과 달리 옛날 집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그때 느꼈던 생동감과 감동은 많이 떨어졌지만 어마어마한 스케일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낯익은 장소를 지나칠 때마다 주요 장면들도 하나씩 떠올랐는데 마음 한켠에 머물러 있던 애달픔과 잔잔한 감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 처럼 느껴졌다.

'논산'하면 대한의 아들과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야만 하는 '군대 훈련소' 라는 강하고도 슬픈 이미지가 가득 했었는데 마치 숨은 보석처럼 갈 곳도 많고 볼거리가 많아서 이제는 좋은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었다.



논산을 벗어나는 길목에 늘어놓은 달콤한 논산 딸기를 사서 서로의 입에 물고 보령시의 '대청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일부러 고속도로를 피해 싸목싸목 구경하며 국도로 갔다. 산길은 뻥뻥 뚫려 있었고 시골 마을은 고요해서 짙푸른 5월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수 있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찰랑찰랑 물이 고인 너른 논과, 나른한 댕댕이가 한쪽 눈만 치켜뜬 채 슬쩍 눈길을 던지는 한적한 동네와, 조금 오래된 듯한 공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작은 마을도 지나쳤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연휴답게 인파가 엄청 많았다. 잠시 해변에 머물러 바닷바람을 쐬고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예쁜 사진도 찍었다. 저녁 식사는 조개 무한리필 가게에서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하고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버스킹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저물어가는 밤바다와 파도소리에 취해 남은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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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와서 바닷물에 발도 담궈보지 못하면 아쉬움이 크게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누이와 함께 해변으로 나갔다. 햇님은 이미 반대쪽 산 너머에서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시누이가 새벽에 가끔 쥐가 난다고 해서 일부러 '맨발걷기'를 하자고 했다.

나도 평소에 맨발걷기를 하고 싶어도 옆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씻기가 귀찮아서 안했었는데 오늘은 바람이 약간 쌀쌀하고 발이 시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걸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어젯밤을 불태우며 터트렸을 폭죽과 담배꽁초와 생활 쓰레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내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새겨놓았을 하트 옆에 쓰레기들이 늘어져 있으면 둘의 사랑이 깨지라고 일부러 하트를 지우고 다니기도 했다.

바닷물은 점점 밀려 오는데 결국 쓰레기들이 바다로 떠내려 갈까봐 눈 앞에 보이는 생활 쓰레기를 주워 모았다.

형님과 속엣말을 하며 해변이 끝나는 곳까지 거의 한 시간 이상을 걷고 집에 들어가니 다들 여전히 취침 중이었다. 고생한 우리도 수면 모드로 다시 전환!

딸은 친구들과 대구에서 약속이 있대서 외출 준비를 마치자마자 보령 터미널로 데려다 주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챙겨주고 함께 해 준 딸이 무척 고마웠다.


오늘은 마침 '석가탄신일'이어서 마지막 코스로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로 향했다.

'금산사'는 가는 길에 인공폭포가 있을 만큼 산도 깊고 나무들이 정말 오래되어 한 사람이 안기도 힘들만큼 굵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셔틀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12시가 되니 식사도 준비되어 있었다. 비빔밥과 생수와 콩나물국과 떡 한 조각씩 나눠 주었는데 초파일에 절에 와 본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절밥 먹어보기도 처음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진 비빔밥이 맛있기는 했으나 일회용 쓰레기가 계속 쌓여가는 모습이 못내 아쉬웠다.

시누이와 함께 한 날들은 마치 잠깐 꿈을 꾼 것처럼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 마무리는 다시 목포에 와서 시부모님 추모관에 들러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마쳤다.

여행하면서 좋았던 점은, 오랜만에 머리를 맞대고 속앳말도 하고 나란히 걸으며 웃고 노래도 부르면서 오롯이 우리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두둑하게 준비하신 지갑을 쉽게 열어줘서 받은 것도 많았다.

항상 불의를 보면 가만있지 못하고 한없이 베풀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시누이 덕분에 즐거운 연휴를 보냈다. 남편도 누나와 어깨동무하며 사진도 찍고 살짝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다음 추석에도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26년 동안 함께 했던 시부모님의 빈자리를 시누이가 대신 채워주시는 것 같아 더욱 든든하고 감사했다.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여행하고 더욱 행복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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