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2년 전, 한창 더운 어느 여름 날,
우리 부부와 딸아이와 딸 친구까지 4명이 신안 증도에 있는 해변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캠핑을 떠났다. 캠핑 자리는 바다를 바로 마주보고 있는 여러 개의 데크 중 하나였다.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편히 보낼 수 있는 텐트를 정성스럽게 치고 딸아이는 친구와 수영을 했다. 친구 부부를 불러서 낚시도 하고 고기도 구워 먹고 오랜만에 만나서 술잔도 기울이며 무척 평온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땅거미가 서서히 질 무렵 친구 부부는 다른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다시 넷이 된 우리는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식사를 후딱 끝내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에는 동화책 그림에나 나올 것 같은 까만 물그림자 위에 노오란 불빛이 아른거리는 해변을 걸어보기도 하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남은 시간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조금씩 더해지고 까만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으나 오히려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밤 깊은 시간에는 바닷물이 모두 빠져서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바다 안쪽으로 남편과 산책도 했다. 참으로 고요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옆 텐트에도 이제 돌이나 갓 지났을 만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알콩달콩 매우 간소하게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슬슬 꿈나라로 여행할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원래 잠귀가 밝아 깊은 잠을 자기가 쉽지 않아서 잠잘 때는 항상 귀마개를 하고 잔다.
그리고 새벽 4시쯤!
낮에는 파도가 가까이 있었어도 별로 무섭다거나 파도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밀물 때여서인지 희미한 가로등 아래 우리 텐트가 들썩이도록 바람도 거셀 뿐만 아니라 까만 먹구름이 이미 하늘을 모두 점령하여 조금씩 비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괜찮겠지...’ 몇 번씩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귀마개를 했어도 시커먼 보자기를 뒤집어쓴 검은 그림자가 해변 바닥을 한번씩 쓸어내었다가 다시 뱉어내는 듯한 불안한 울림과 무척이나 음산한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그리고 이른 새벽에 짐을 챙기기도 어려우니 포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두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하려고 계속 숫자를 되뇌고 별을 세었으나 별들도 어두운 하늘에 모두 숨어버려서 꿈 속을 방황만하다가 금방 깨버리고 말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텐트 역시 계속 날아갈 듯 팔랑거리는 이 상황에서 꿀잠 자는 식구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빗방울도 조금 거세어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옆집 신혼부부도 어느새 일어나 짐을 대충 챙겨서 순식간에 떠나 버렸다. 성난 파도가 바로 데크 앞까지 주구장창 진을 치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덮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할 수 없이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자갸~~ 바람이 무진장 많이 불고 비도 오는데...” 그랬더니 “근디? 왜? 괜찮혀! 언능 자!"
그러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오줌마려운 똥강아지마냥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들이밀었다, 누웠다, 일어났다를 계속 반복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안좋은 상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남편을 강력하게 깨웠다. 그리고 딸도 깨우고 딸 친구도 깨우고.
딸들이 웬 날벼락인가 싶었겠지만 비오니까 그냥 집에 가서 편히 자자며 무조건 차에 들여보내 놓고 남편은 궁시렁거리며 비몽사몽 간에 모래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장비와 짐을 챙겼다. 그리고 성난 파도 소리만 가득한 칠흑같은 시골길을 뒤로하고 빗속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혹시 사고났다는 소식이 있을까 싶어 뉴스에 귀를 쫑긋거려봤지만 당연히 그곳엔 별일이 없었고 심장이 콩알만 한 나의 소심함 때문에 식구들이 무척 힘든 하루를 보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올해 10월 어느 날, 날씨가 좋았다가 햇볕이 뜨거웠다가 오전엔 기온이 뚝 떨어졌다가 종잡을 수 없는 날들 중 하루를 붙잡아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바닷가 근처로 캠핑을 예약했다. 물론 지난번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신안 섬 중 튤립 축제로 잘 알려진 임자도가 다리로 연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구경도 할 겸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전에는 남편 모임 때문에 영광에 들렀다가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시골 풍경을 구경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임자 섬에 연결된 웅장한 다리를 건너 가슴이 탁 트이는 드넓은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해안도로를 따라 안쪽으로 깊게 들어갔다.
어제는 비가 왔지만 오늘 날씨는 분명 흐림으로만 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거세었다. 파도가 한번씩 칠 때마다 물보라가 높게 일면서 작은 물방울들이 바람에 밀려 안개처럼 떠다니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시야를 가리는 섬 하나 없이 앞이 탁 트인 곳이어서인지 파도가 밀려갔다 밀려오는 과정을 생략하고 끊임없이 해안 쪽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소리 또한 바다 밑바닥부터 뒤집어져서 전부 다 토해낼 듯한 포효와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켜 부셔버리겠다는 몸부림처럼 지속적으로 울어댔다.
2년 전 캠핑과 달랐던 점은 우선, 캠핑장이 바다 바로 코앞은 아니고 해안도로를 건너고 카라반과 3층 높이의 건물이 앞을 막고 있어서 그나마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높은 곳으로 대피하면 되겠지’ 생각했었다.
우리는 잔디가 푹신푹신한 넓은 공터에 둘만 잘 수 있는 2인용 텐트를 후딱 쳤다. 원래는 4륜 바이크도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안을 거닐며 사진도 찍고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볼 계획이었으나 잿빛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 바람도 무척 거칠고 파도가 너무 높아서 바다 근처에는 얼씬하기도 힘들었다. 이른 간식을 먹고 빈둥빈둥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낮잠 한숨 자고나니 아직도 땅거미가 남아있었다. 파도는 여전히 성난 듯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지만 다행히 썰물 때였는지 그래도 해안에서 조금 멀어져 있었다.
사실 이번만큼은 절대 중간에 가자고 하지 않고 잘 버텨보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해지면 자는 일 말고는 더이상 할 일이 없는데 밤새 저렇게 울어대는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기에 내 심장은 몹시도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결국 수십번 고민하다 남편을 잘 꼬드겨서 짐을 빠르게 챙겼다. 사방이 막 어둠에 잠기려는 경계에서 여전히 발목을 붙잡을 것처럼 다가서는 파도를 뒤로한 채 그렇게 임자도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가는 길에 비가 한두 방울씩 살짝 떨어졌는데 남편에게 면목이 없어서 “짐 챙기고 나오길 잘했지? 안그랬으면 비 맞았을 거 아냐?”라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다.
왜일까? 왜 그렇게 작은 일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은퇴 후에 나의 로망은 앞 시야에 작은 풀꽃들이 나풀나풀 가득한 앞마당을 한참 지나 모래해변을 거닐며 조개도 캐고 가슴 두근거리는 해돋이와 불그스름한 수평선 끝자락으로 매일 해넘이를 볼 수 있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에는 수시로 산책할 수 있는 동산이 있는 곳을 꿈꾸는 내가 왜 이렇게 바다를, 파도를 무서워하는 걸까? 원래 성격은 바다낚시도 좋아하고 놀이기구도 잘 타고 씩씩하고 용감했다고 생각된다. 나이를 먹어서 심장이 쪼그라들었을까?
엊그제 어느 강의를 들었는데 문득 '공황장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공황장애란, 뚜렷한 근거나 이유없이 갑자기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불안장애라고 한다.
내가 스스로 병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이런 공포심을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이나 기억도 딱히 없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집 근처에 아낙네들이 빨래할 수 있는 냇가가 있었다. 가끔 물고기도 잡고 조금 더 먼 곳에서는 수영도 하고 놀았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장마 시에는 냇물이 불어 세차게 흐르며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자려고 누워있는 내 귓가를 맴돌고 집까지 범람할까봐 어린 마음에 밤새 걱정했던 기억이 저편에 가물가물 남아있긴 하다.
그래서일까? 아무튼 이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이제는 남편에게 바닷가로 캠핑가자는 말하기도 참 민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여름에는 캠핑장이 바닷가와 조금 더 멀리 있거나 높은 곳에 있어 파도가 넘어와도 안전에 끄떡없을 만한 곳을 예약하여 스스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두 번의 굴욕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