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이야기가 아닌 곳에서 불교는 비로소 뿌리내린다
한옥박물관에서의 두 번째 강좌 주제는 불교와 여성이었다.
보통 이 주제는 선덕여왕처럼 위로부터 내려오는 불교 이야기로 시작된다. 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탑과 절을 세우며, 나라의 이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두 번째 강좌에서는 그 길을 일부러 비켜 가보기로 했다. 왕이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제도보다 생활에 가까운 자리에서 불교를 붙잡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다. 그래서 『삼국유사』 속 욱면을 불러내고, 국경을 건너 베트남의『영남척괴열전』 속 만랑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았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불교, 여성의 몸과 노동을 통과해 성불로 이어진 이야기들이다.
『삼국유사』와 『영남척괴열전』을 함께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된 시선이 또렷해진다. 이 두 책은 왕과 왕비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에서 밀려나기 쉬운 존재들, 가난하고 미천한 여성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욱면은 계집종이고, 만랑은 부모 없이 자란 가난한 여인이다. 이들은 신성한 혈통도, 뛰어난 재능도 없다. 불경을 유창하게 외우지도 못하고, 수행자다운 몸가짐을 갖추지도 못한다. 대신 이들에게는 하루를 견디는 시간이 있다.
욱면은 주인의 집에서 늘 꾸중을 듣고, 매번 곡식 두 섬을 받아 하루 저녁에 다 찧어야 하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밤이 되면 절로 가 염불을 한다. 만랑 역시 사찰의 중심이 아니라 부엌에서 밥을 짓고 쌀을 찧으며 수행을 대신한다. 이 장면들은 불교를 ‘고상한 사상’이 아니라 ‘생활 속 반복’으로 끌어내린다. 이 여성들의 수행은 화려하지 않지만 끈질기다.
흥미로운 것은 두 이야기 모두 ‘잘함’보다 ‘계속함’을 중요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욱면은 몸을 스스로 결박할 만큼 간절했고, 만랑은 잠든 사이에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성불의 조건은 지식이나 언변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이다. 말수가 적고, 세상 눈에 띄지 않는 여성들이 불교의 깊은 자리에 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성불 이후의 모습이다. 이들은 하늘로 사라지지 않는다. 만랑은 지팡이로 가뭄을 해결하고, 욱면의 신앙은 마을 전체의 믿음으로 확장된다. 불교는 초월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로 작동한다. 불상이 만들어지고, 제사가 이어지고, 마을의 시간 속에 불교가 스며든다. 대중화된 불교란 교리가 쉬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뜻임을 이 이야기들은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이 오래 남는 이유는 여성의 몸을 통과한 신앙을 그리기 때문이다. 욱면과 만랑의 몸은 늘 고단하다. 맞고, 굶고, 일하고, 잠들고,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그 몸이 성불의 통로가 된다. 관념이 아니라 노동과 인내가 수행이 되는 순간이다. 이 여성들은 위대해지지 않는다. 미천한 채로 끝까지 살아낸다.
그래서 『삼국유사』와 『영남척괴열전』은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다. 이 이야기 속 여성들은 오늘 우리의 이웃과 닮아 있다.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말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쓰는 사람들. 이 두 책은 오래전부터 말해왔다. 불교는 위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중심에서만 자라지 않았다고. 부엌에서, 마당에서, 계집종의 방 한켠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 그래서 한옥이라는 공간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더욱 의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가장 깊은 사유가 시작되듯, 불교 역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음을, 욱면과 만랑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욱면과 만랑을 디지털 사회와 인공지능 시대에서 어떻게 이해시킬까 고민해 보았다.
디지털 시대에 욱면과 만랑은 보이지 않는 노동과 지속성의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알고리즘은 빠른 성과와 말 많은 콘텐츠를 선호하지만, 두 여성의 수행은 조회수도 팔로워도 없는 반복의 시간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여기서 나온다. 데이터 뒤편에서 묵묵히 유지·관리·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들, 플랫폼을 떠받치지만 기록되지 않는 노동처럼 말이다. 욱면과 만랑은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치로 남겨야 하는지, ‘속도’가 아니라 ‘지속’을 묻는 것 같다.
#나는 이 공간에 급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기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