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베트남의 난생신화 상상력

<삼국유사>와 <영남척괴열전> 속 문화의 충돌을 보며

유튜브 신화노트에서 김수로 탄생을 제작한 이미지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느리게 만든다. 너무 빠른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조금은 머뭇거리며 따라가야 비로소 감정이 닿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난생신화가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이 이야기들이 설명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으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의 난생신화를 이야기할 때, 먼저 짧게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이 있다. 바다의 용왕 락롱꿘과 산의 여신 어우꺼의 만남이다. 락롱꿘은 물의 세계에서 올라와 사람들을 괴롭히던 괴물과 재앙을 물리치는 존재이고, 어우꺼는 숲과 산, 대지의 생명을 품은 존재다. 두 존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부부가 되고, 어우꺼는 어느 날 백 개의 알을 낳는다. 그 알에서 태어난 백 명의 아이들 가운데, 오십은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가고 오십은 어머니를 따라 육지에 남는다. 조용한 신화 속 이혼이 성립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별 속에서 베트남은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는 하나의 알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 짧은 신화는 이후 베트남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구조는 한국의 난생신화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한국의 『삼국유사』 속에서도 알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고, 가야의 김수로왕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알 가운데 하나에서 나온 존재다. 이 알들은 우연한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내려온 표식이다. 왕은 선택된 존재이며, 공동체를 이끌 사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반면 베트남의 『영남척괴열전』 속 난생신화는 왕 한 사람보다 사람들 전체를 향한다. 백 개의 알은 곧 백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지역과 민족을 상징한다. 베트남의 난생신화는 “누가 가장 위대한가”보다 “어떻게 함께 시작했는가”를 묻는다. 알은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만드는 장치다.


이 차이는 두 문화가 신화를 필요로 했던 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난생신화가 왕권과 국가의 정당성을 세우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베트남의 난생신화는 다종족 사회를 하나로 묶는 기억의 끈이 된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다양성을 동시에 겪어온 베트남에게 “우리는 모두 용과 선녀의 후손”이라는 말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점은 두 신화 모두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늘, 용, 바다와 같은 신적 존재가 아버지로 등장하고, 알이라는 비인간적 탄생 방식이 선택된다. 이는 왕이나 민족의 기원이 인간 사회 내부의 경쟁이나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큰 질서에서 왔다는 상상력이다. 인간 세계의 갈등을 넘어서는 기원을 마련함으로써, 공동체는 자신을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여성성이다. 가야의 허황옥과 베트남의 어우꺼는 모두 외부에서 온 여성이고, 바다와 육지, 다른 문화를 연결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들은 단순히 아이를 낳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를 열고,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래서 한국과 베트남의 난생신화는 묘하게 닮아 있다. 알이라는 조용한 탄생,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아이들, 그리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려는 간절함. 이 이야기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어쩌면 이런 뜻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규정되지 않은 존재였고, 그래서 서로를 품을 여지가 있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재 많은 베트남 이주 여성들이 들어오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한국과 베트남의 난생신화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더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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