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억울한 배나무를 찾아서

운문사의 이야기가 디지털 윤리를 묻다

청도 운문사 배나무

나는 서해안 끝자락 시골에서 자랐다. 바닷바람과 흙냄새, 해 질 녘의 붉은 수평선이 지금도 내 머리 속에 또렷하게 기억되는 곳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시골의 낭만보다 스타벅스와 도서관과 지하철이 있는 문명의 편리함을 더 좋아한다. 불이 환하고, 버스가 자주 다니고, 필요한 것이 곧바로 손에 닿는 삶. 나는 그렇게 도시의 속도에 익숙해져 왔던 것 같다.


최근 이사한 곳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비교적 한적한 동네다. 중심에서 비껴 났지만, 도서관만큼은 유난히 잘 마련된 곳이다. 산책하듯 들른 도서관에서 우연히 ‘재능기부’라는 것을 하기로 약속했다. 거창한 사명감보다는, 책이 있는 공간이라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나는 미래에 이야기 할머니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늙어서도 어린아이들과 신기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게 웃을 수 있는 세상 속 편한 할머니로 늙고 싶다.


대학생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대학생이 되기 이전의 시간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아직 결론보다 질문이 많은 시기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마주 앉았다.


함께 펼친 책은 삼국유사였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멈춰 선 곳은 청도 운문사에 전해지는 「보양과 배나무」였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권선징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해와 어긋남, 그리고 말의 위험성을 품고 있었다. 내용을 잠깐 들어보자.


이무기, 정확히 말하면 ‘이목(螭木)’이라 불리는 존재는 아직 용이 되지 못했지만 선했다. 보양 스님을 돕고, 가뭄에 비를 내려 어려운 백성을 살린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는 하늘의 규칙을 어긴 “이목을 치라”는 명을 받는다. 문제는 이 ‘이목’이라는 말이 이무기(螭目)도, 배나무(梨木)도 가리킬 수 있는 같은 발음이라는 점이다. 말의 오해, 소리의 겹침. 그 결과 하늘의 벼락은 죄 없는 배나무를 내리친다. 선한 이무기는 숨고, 잘못은 없지만 말하지 못한 배나무가 대신 큰 상처를 입는다.


아이들은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놀라며 질문했다.

“이무기가 아니라, 이름이 같아서 배나무가 맞은 거예요?” 그렇다. 이 장면은 악의보다 오해와 전달의 오류가 더 큰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도가 아니라, 전달 방식이 문제였던 셈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오늘날의 주제로 옮겨올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이목’은 무엇일까. 알고리즘이 단어를 오해하고, 맥락 없는 신고가 작동하고, 자동화된 판단이 사람을 가른다. 선한 의도로 쓴 글이 삭제되고, 누군가는 규칙의 이름으로 차단된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했다.”

운문사의 하늘 사자도 다르지 않다. 그는 악인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명령을, 주어진 언어 그대로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하다. 선한 존재는 사라지고, 말하지 못한 존재가 상처를 입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배나무다. 선택권도, 발언권도 없었던 존재.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집단 공격 속에서 가장 깊은 상처는 늘 조용한 이들에게 남는 것 같다.

아이들은 묻는다.

“아무 말도 안 하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고전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태도를 가르친다. 말의 무게를 생각하는 태도, 규칙 뒤에 숨지 않고 결과를 바라보는 태도, 선의와 책임을 함께 묻는 태도다. 그리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 보는 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도서관에서 토론을 하고 나서며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이 이야기, 요즘 이야기 같아요.”

맞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다시 고전을 읽는다.

기술이 판단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사유는 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운문사에서 벼락을 맞은 그 배나무 자리에서, 디지털 시대의 윤리는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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