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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봄 Oct 20. 2023

생각보다 사연이 많아

라면

결혼하고 음식을 주로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잘하는 음식이 없었다. 결혼 전에 엄마를 도와 밥상을 차리기는 했지만, 밥을 짓거나 반찬을 만들지는 않아서 자신 있는 요리 한 가지도 없었다. 차라리 설거지가 편했다. 남편은 입맛도 나와는 사뭇 달라서 결혼 초에는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반찬이 입에 안 맞아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을 때 라면 물량이 안 맞는다며 투덜대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직접 끓이기 시작했다. 자취 경험이 있던 남편은 라면만은 잘 끓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한다. 라면 국물은 거의 먹지 않는 편이다. 각자 입맛을 바꾸기 어렵다 보니 라면 맛에 있어서 의견일치를 보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신 뒤로 집에서 삼시 세끼를 드시게 되자 하루 한 끼는 라면을 먹어도 괜찮겠다고 하셨다. 아마도 엄마 편에서 보자면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퇴직하시기 전까지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드셨지만, 점심은 직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으니 퇴직 후 점심이라도 간편하게 라면으로 해결했다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엄마를 배려해서 그러셨는지 라면이 진짜 드시고 싶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퇴직 후 오랫동안 점심 한 끼는 라면과 같은 면 종류를 드셨다. 아버지는 면 종류를 드실 때면 면발이 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키더라도 꼭 국수는 가늘게 가늘게를 외치셨던 분이다. 당연히 퉁퉁 불어서 두꺼워진 면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가끔 친정에 들르면 아버지는 짜장면을 시켜 주랴 하시곤 했는데 여전히 가는 면발을 좋아하셨고 단골 중국집은 면발은 가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 줄 정도였다. 단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라면이다. 라면만은 불었다 싶을 정도인 걸 좋아하셔서 꼭 푹 끓여달라고 하셨다. 온 식구가 다 같이 라면을 먹더라도 아버지가 드실 라면은 푹 끓여야 하니 따로 끓였다. 그렇게 아버지의 하루 한 끼 라면사랑은 꽤 오래 지속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 혼자 계시는 친정을 거의 날마다 들렸던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혼자 식사하시지 않게 하려던 마음이 컸다. 아침과 저녁은 가까이 사는 오빠와 남동생이 챙겼으니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엄마는 하루 세끼 전부 자식들과 드신 셈이었다. 한 번은 친정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러도,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안 받으시길래 어딜 가셨나 했는데 두어 시간 뒤에 다시 확인해 보니 옥상에 올라가 있느라 어긋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엄마는 혼자 라면을 끓여 드셨다. 엄마가 치매로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있어서 가스 불을 다루거나 부엌에서 뭔가를 하시는 일이 자식들에게는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이던 때였다. 전화를 끊고 친정에 가보니 개수대안에 라면 국물만 조금 남아있는 자그마한 편수 냄비가 있었다. 자식들 걱정과 달리 엄마는 늘 해오던 부엌일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혼자 라면을 끓여 드셨으리라. 그 뒤로 엄마의 증상은 손쓸새 없이 빠르게 악화되어 치매로 진행됐고 60년 넘게 부엌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하셨는데 결국 손수 해 드신 마지막 음식이 라면이 됐다.     


라면은 조리법이 포장지에 적혀있음에도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물이 끓으면 스프를 먼저 넣는다거나 면을 먼저 넣는다거나 뚜껑은 꼭 열어 놓고 끓인다거나 콩나물이나 숙주 혹은 해물을 함께 넣어 끓인다거나 파, 마늘을 꼭 넣는다거나 달걀을 넣더라도 풀어서 끓이거나 아니면 달걀을 마지막에 넣고 풀지 않은 채로 불을 끄거나 하는 것처럼 저마다 고집하는 방법이 있다. 라면은 5분 이내에 조리가 가능해 간편식의 대명사가 됐고 야외에서 먹기 쉬운 컵라면도 있으니 집 안과 밖에서 가장 편하게 즐길 수 있으면서 해외에 나가도 김치만큼이나 먹고 싶을 정도로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 됐다. 좋아하는 그 수만큼 조리법도, 라면에 얽힌 사연도 많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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