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간을 걷는 사람들

‘은둔형 외톨이’가 그대로 ‘은둔 중년’이 되었다

by 아우리

얼마 전 KBS <추적60분> '은둔 중년' 편이 방영되었습니다. 20년 전 방 안에 머물던 젊은 청년들이 어느덧 세월을 지나 '중년'이 된 채로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가 그대로 '은둔 중년'이 된 현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존재한 채로 멈춰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남성은 대학 입시 실패 후 심리적 좌절에 빠져 이십 년 가까이 방 안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나이가 들고, 자식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아무도 그 문을 제대로 두드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계속된 실패 속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 주변에서 추천해주는 일에 대해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고 했는데, 그 말은 고집이 아니라 자기 부정과 절망의 다른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선이라는 족쇄,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오래전 동생의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특별히 오래 준비한 것도 아닌데 엄마는 어느 날부터 "아무 일이라도 해라"는 말을 반복하셨습니다.

저는 "그에게 맞는 일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자"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혹시라도 그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도 처음부터 스스로를 가두려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끊임없는 비교와 조용한 질책을 받으며 사람은 말하지 않기로, 보이지 않기로 선택합니다.

'쉼'을 택한 마음이 시간이 지나 고립과 자기 혐오로 번질 때, 그건 더 이상 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묻게 됩니다. 쉼은 언제까지가 쉼일까요?

그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며칠이면 충분하고, 누군가는 몇 달이 필요하며, 어떤 이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기준은 분명합니다. 쉼이 고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연결이 끊기고, 자신의 존재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면 그건 쉼이 아니라 지속된 단절입니다.

그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을 '이상한 존재'로 여기는 시선이야말로, 진짜 감옥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글을 씁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누군가의 '은둔'을 한 걸음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말해줘야 합니다.

"너는 여전히 살아 있어줘서 고마운 사람이야."
"아직 늦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 당신이 먼저 문을 두드려도 좋아요."

이런 따뜻한 말과 함께, 혹은 말을 건네기 어렵다면 한 통의 문자나 안부 전화 역시 그들을 세상으로 이끄는 소중한 사다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고민합니다. 정말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드라마 속에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주인공이 방을 박차고 나와 세상과 맞서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2년째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20년째 그 방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림이 방조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과연 최선이기만 할까요?

그래서 저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다리되, 문을 두드리자. 존중하되, 외면하지 말자. 좋은 말로만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조차 없었다면 그는 더 깊이 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다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저는 조용히 목소리를 건넵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8화진짜 엄마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