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야흐로 겨울이다.
어설픈 첫눈이 와서 겨울이고 패딩을 꺼내 입고 털신을 신어서도 겨울이지만
겨울의 시작은 김장 김치다.
가을 내내 햇살과 바람과 갑자기 추워진 서리까지 맞은 배추와 무를 뽑아 절이고 치대고
한 통 가득 담아 놓으면 겨울아, 와라.
아랫목에 앉아 고구마 소쿠리와 서걱대는 동치미 한 대접과 털실 뭉치와 라디오가 있으면
완벽한 겨울나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텃밭에는 아직도 배추와 무가 추위에 떨고 있다.
뿌리기만 하고 거둘 줄 모르는 주인의 안일함에 동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림을
우리 텃밭에서는 볼 수 있다.
32년 주부 생활 중에 아직 한 번도 김장하지 않았다.
아니, 하는 법을 모른다. 할 의욕도 없어 매번 이웃이나 엄마 김치를 먹고 살았다.
몇 년 전부터 엄마 김치는 끝이 나고 이 집 저 집에서 주는 김치를 모아 한통속을 만들어 서로 얽히고설킨
나만의 김치를 먹고 있다.
입맛은 변하지 않는지, 올해도 어김없이 남편은 김장 김치를 먹고 싶다고 한다.
어쩌랴, 아직 동네 김장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시장에서 버무린 김치를 사 먹어야 하나, 고민 중에
낭보다.
아는 언니네가 김장했다는 소식과 가져가라는 이 세상 가장 따뜻한 문자를 보냈다.
지체할 시간 없이 빠르게 가져와 저녁 밥상에 올렸다.
쭉쭉 찢어서 생굴까지 얹어 먹는 맛이란 이맘때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다.
두부에 싸서도 먹고 김밥에 얹어서도 먹고 갓 지은 쌀밥에 그대로 올려 먹는 맛, 겨울이지 않으면
이 맛을 절대 느낄 수 없는 시간.
추워서 발 동상을 앓아도 나는 겨울이 좋다.
날개 없는 천사들이 보내주는 정이 좋아.
이웃이 좋아, 오늘 아침에도 김치 한 접시를 맨밥에 올려서 먹고 왔다.
너무 많이 먹어 뱃속이 다소 거북해도 이 시간, 이 겨울에만 가질 수 있는 호사이기에
충분히 견디며 즐길 것이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 속에는 이웃들끼리 모여 서로 날 선 감정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쁠 것이다.
오늘은 누구네 김치를 먹을까, 골라 먹는 재미에 벌써 군침 돈다.
*김장하는 날
이웃들이 모여 김장하는 날
마당이 좁아
어린 나를 밖으로 쫓아도
빨간 양념 통 뒤에 숨거나
울먹이며 절인 배추처럼
가만 숨죽이며 기다린다
갓 버무린 김치에 돌돌 말아 먹는
삶은 돼지고기 맛이란
거치적거린다고 꾸중 들어도 좋았어
눈물 찔끔 슬퍼도 행복했던 시간
일 년에 딱 한 번 입 호강하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