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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Sep 01. 2024

고전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테디베어

재창조된 테디베어들이 거장들의 미술작품 속으로 들어왔다.

테디 베어는 명화, 패션, 여행 등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 속에서 재 창조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테디 베어의 다양한 재창조 과정을 한눈에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을 꼽자면, '제주 테디 베어 뮤지엄'이다.

우리에겐 '곰돌이' '곰순이' 인형으로 친근한 테이 베어가 명화 속 주인공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면서, 인류사를 빛낸 명화를 다시 감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지하 2층 테디베어 미술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와 조각상의 주인공이 테디베어로 재탄생한 채, 반겨준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Luis Vuitton 테디베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네스 봉제 테디베어까지 현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거장의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와 재 창작된 테디베어들이 있다. 이곳 미술관에서는 테디베어 조각상과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손녀 꾸미를 위해 찾은 테디베어 뮤지엄이었지만, 할미도 꾸미만큼 흥미로웠던 곳이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미술사를 재탐구(?)하는 중이었기에 이렇게 만난 콘텐츠에 더 많은 관심이 갔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이 작품은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1880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은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조각상이다.

이 사람은 턱을 오른팔에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그의 오른팔꿈치는 자연스레 왼쪽 다리에 얹혀 있다.

높이는 186 m 석고상(石膏像)은 1880년에 완성되어, 최초에는 '시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던 건, '지옥의 문' 위에서 군상(群像)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 때문이었다.  

단체의 <신곡>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 가운데 시인을 등장시키려고 한 로댕의 시도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영원히 계속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력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밀로의 비너스', 고대 그리스 대표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여신을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높이 202cm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1501


다비드는 대장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인 소년 영웅으로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개혁 왕으로서 피렌체 개혁정부 상징이 되었던 인물이다.

5.49m의 거대한 다비드 누드상은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피렌체 시청인 팔라초 베키오 앞에 세워졌다. 당시 시민들은 도전적인 시선과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순수한 다비드 상을 보며, 자기들 미덕이 구현되었다고 믿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08~1512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작업대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힘든 자세로 4년간 작업했다. 프레스코화 밑바탕이 될 회반죽을 천장에 바르거나 그림에 사용할 물감을 배합하는 일은 고용된 조수들이 작업했지만, 천장화를 창조적으로 그려 완성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섬세하고 위대한 예술작업 결과물이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 사이 바티칸 시국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최후의 심판'을 비롯하여 2,000점의 그림을 남겼다. 원래 그는 조각가였으나, 그의 재능을 시기한 도나토 브라만테가 교황 유리오 2세에게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도록 추천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림 그릴 것을 요청했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받아들였다.

작업은 엄청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목과 눈에 심한 이상이 생기기도 했고, 교황과의 이견도 잦아, 그는 이 위대한 작업을 매우 힘들게 진행했다.

그러나 고생 끝에 완성된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하며 찬양하고 감탄했다.

그를 시기했던 경쟁자 건축가 브라만테도 결국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프랑스혁명(1789-1799)의 옹호자였다. 다비드는 잇따르는 정치 사건 속에서도 나폴레옹을 열렬하게 지지했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새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찬양했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 장면을 선택한 다음, 다비드에게 자신을 '사나운 말 위에 올라탄 평온한' 모습으로 그릴 것을 명했다. 황제의 이목구비가 이상화되어 표현된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이 제작되는 동안 나폴레옹이 한 번도 모델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비드는 아들을 사다리 꼭대기에 앉히고 포즈를 구상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마렝고 전투(1800)에서 나폴레옹이 입었던 제복을 받아, 군복만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빈치의 '모나리자', 1503


다빈치는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의 부인의 초상화인 '모나리자'를 그렸다. 모나리자 미소는 오늘날까지도 보는 사람에게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화다.

오묘한 감정 표현의 극치를 미묘한 명함 차이로 보여주는 다빈치의 대표작이다.

배경의 먼 쪽은 푸른색, 가까운 쪽은 붉은색으로 대기 원근법을 사용했다.

대기 원근법은 대기(공기) 중 습도와 먼지의 작용으로 물체가 멀어질수록 푸르스름해지고 채도가 낮아지며, 물체 윤곽이 흐릿해지는 법칙을 알고 감상하면 더 감동적이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2007년 11월에 네이처지가 선정한 인류 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르네상스시대 다빈치가 지구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 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도달할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다빈치는 그의 많은 작품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한 예술성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다빈치는 호기심 많은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하곤 했다. 그림과 라틴어는 물론, 운하 설계까지 한 과학자였다.

67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랑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다빈치의 모든 유산을 상속했다. 1570년 멜지 사망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다빈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났다.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자식들'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자식들, 1787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매력적인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았다.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왕실과 귀족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해서 당대 명성을 얻은 여류 화가다. 본명은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Louise-Élisabeth Vigée, 1755 ~ 1842)이며,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시대 프랑스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당대에 가장 유명한 여성 초상 화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밀레의 '만종', 1857~1859


'만종'은 밀레가 유화로 그린 명화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들녘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일손을 놓고,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저녁기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다.

발치엔 감자 바구니가 놓여 있고, 캐다 만 감자 몇 알이 흩어져 있다.

부부는 수확을 안겨준 자연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우리 귀에도 들리오는 것만 같다.

그림의 원제는 ‘삼 종 기도(The Angelus)’로 성당에서 하루에 세 번 종을 쳐 알려주는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밀레가 덧붙인 제목은 ‘저녁기도’인데, 사람들은 이 그림을 성당 종소리에 초점을 맞춰 '만종'으로 불렀다.

우리나라 박수근 화백도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노르망디 그레빌 아그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레는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 삶을 관찰하며 자랐다.

농부였던 자신 경험을 토대로 농촌의 고단하고 열악한 일상 삶을 관찰자 입장에서 그렸다.

주로 농부 모습 그린 밀레를 두고, 보수 우파들은 그를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란 비판을 했다.

그는 이렇게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등 정치사상에는 관심 없다며 일축했다.

밀레는 1837년 파리로 가 들라로슈 제자가 됐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다.

1848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들'이 살롱에 당선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듬해 바르비종으로 옮겨가 농민들 생활 모습을 그렸는데, 밀레는 농부 일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그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 작품들도 밀레 풍경화에서 영향받았고, 밀레 작품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살아생전 밀레의 몇몇 그림은 해외로 팔려나갔는데, 밀레 사후 세월이 흘러, 밀레가 재평가를 받게 되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측은 거액을 들여 그의 그림들을 해외에서 다시 사 오기도 했다. 밀레는 프랑스 바르비종파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앙리 루소의 '꿈'

 '야드비가'가 등장하는 앙리 루소의 '꿈', 1910


루소의 작품 '꿈(The Dream)'은 '야드비가'라는 여인의 꿈속 풍경을 담았다.

왼쪽 있는 누드 여인이 야드비가다.

그녀를 둘러싼 숲은 푸른빛과 붉은빛 큰 꽃들로 둘러싸여 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과일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뭇가지에는 아름다운 빛을 지닌 우아한 새와 원숭이로 보이는 검은색 짐승들도 보인다.

나무 사이로 코끼리의 긴 코도 보이고, 뱀을 부리는 한 사람이 나팔을 불고 있다.

야드비가는 짙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몸은 정면을, 고개는 풍경을 바라보듯 오른쪽을 향해 있다.

오른쪽 팔은 바닥을 짚고, 왼팔은 소파 등받이 위로 뻗어있고, 그녀가 소파 등받이에 턱 걸친 손가락 끝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무엇에 닿을지 궁금하게 한다.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사자와 나팔 끝을 비껴가는 듯 보이니, 그 끝은 루소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꿈길일까?

루소는 이 그림 옆에 야드비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를 붙여놓아, 그녀의 꿈과 현실이 결합된 그림임을 모두가 알 수 있게 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 어느 거실 소파에 누워 있지만, 둘러싼 밀림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꿈속 풍경이다. 그림 속 숲은 루소 자신의 꿈의 공간이기도 하다.


가난한 세관원으로 살았던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는 49살이 돼서야 화가가 됐다.

당시 유럽인들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60세가 넘은 노인이 화가로 데뷔한 셈이었다.  

한 번도 열대지방에 가본 적이 없던 루소는 가끔 파리 식물원에 들러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이 스케치가 루소의 상상 속 열대림을 만들어 냈다.

루소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아마도 아마추어 화가의 순진무구한 열정과 상상력이 빚어낸 감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의 '붕대를 맨 자화상

'붕대를 맨 자화상', 1889


고흐는 인물화를 즐겨 그린 화가다.

인물화는 비주류였던 시대였지만, 고흐는 인물화를 통해 기이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내면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하지가 않았다. 그림 주문은 고사하고 선뜻 그림의 모델이 되려는 사람도 없었고, 모델을 살 돈도 여의치가 않았다.

이런 환경 탓인지 고흐는 10년 동안 무려 4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극도의 공허함이다. 그는 예민하고 나약한 기질 탓인지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고통받으며 살았다.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인 고흐는 자화상을 통해 암울함 삶과 고독한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표현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만의 세계 표현했다.

1900년대는 화가의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색을 재해석하던 '표현주의' 시기였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화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어릴 때의 고흐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고흐가 태어난 지 2년 후 여동생 아나 코르넬리아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태어났다.

흔히 고흐가 어릴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고흐는 미술가보다는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고흐는 상당한 독서광으로, 신학서적과 문학작품을 많이 탐독했는데 이 또한 고흐의 인생과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고흐의 미술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는 직접 야생화를 스케치하거나 직접 만든 꽃다발을 수채화로 그리는 등 미술을 취미생활로 즐겼다. 고흐가 9살 때 개를 보고 그린 스케치는 어머니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다.

고흐 생전 단 한 작품이 판매됐는데, 1890년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다.

당시 평론가가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평론한 글을 보면, "반 고흐는 색의 명암이나 색조의 정확성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붓을 격렬하게 놀려서 거대한 풍경을 그렸다. 양탄자를 향해 얼룩덜룩한 책 더미가 놓여있다. 연구에는 괜찮을 법한 모티프이지만 회화의 소재로는 적합지 않다." - 귀스타브 칸, 1888년 -

그러나 그 밑에 재평가를 보면,  "사후엔 생각보다 빨리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고,  사후 15년쯤부터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


'그랑드 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는 쇠라의 가장 유명한 대작으로 19세기 회화 상징이 되었다.

각기 다른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공원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병치된 작은 점들은 감상자 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된다. 물감 안료가 원래 갖고 있는 색과는 다른 색이다. 쇠라는 그림을 선으로 그려야 한다는 미술사의 오랜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깬 화가다.


쇠라는 약 3m 너비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단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이 작품을 준비하며, 공원에서 60개 정도 습작을 그렸다. 2년간 40여 점의 스케치와 20여 점의 소묘를 그려 완성한 작품이 바로 '그랑드 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다.

빛이 다양한 색상을 띤다는 광학 이론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우리는 수많은 점들이 모여 찬란하게 빛나는 명화를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조르주-피에르 쇠라(Georges-Pierre Seurat, 1859년 12월 2일~1891년 3월 29일)는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점묘법의 화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화가이자 후기 인상주의 작가다.

쇠라는 즐거운 정서는 선을 위로 향하고, 따뜻한 색상을 사용, 밝은 색조들을 지배적으로 만들었다. 고요함은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사용하여 밝음과 어둠을 균형 있게 썼고, 선을 수평적으로 그렸다. 슬픔은 어둡고 차가운 색상을 이용, 아래로 향하는 선을 사용했다.

“누군가는 내 그림에서 시(詩)를 보았다고 하지만, 나는 오직 과학만 보았다.” 점묘법을 개발한 신인상주의 화가 쇠라가 한 말이다. 쇠라의 회화는 미술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지만, 바로 그 작업 방식 때문에 명성에 비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완성 작품을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클림트의 '키스', 1907~1908


클림트의 '키스'는 1907-1908년 그의 황금 시기에 그린, 황홀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여자는 동글동글한 무늬, 남자의 무늬는 직사각형을 사용하여 부드러움과 강함을 황금색으로 담아냈다.

그는 도금하는 기법으로 다수의 그림을 남겼다.


구수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작가로 회화, 벽화, 스케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주요 주제는 여성의 신체로, 그의 작품은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다.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反) 아카데미즘 운동을 했다.

그는 1906년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여 전시 활동을 시작했다.

클림트는 빈 아르누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미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ANIMATRONICS

'테디베어뮤지엄'의 테디베어들은 모터 구동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아날로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테디가 별안간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현대 과학의 접목을 격하게 환영하게 된다.

테디베어뮤지엄의 모터 구동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좀 느리긴 하지만.

각자의 추억 속에 남아있던 테디베어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눈앞에서 걸어 다니면서, 명화와 역사 속 유명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재창조해 내고 있었다.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을 재창작한 테디베어들


최신 유행이 시작되고 만들어지는 '패션쇼'에 등장한 테디베어 모델들



테디베어 미술관의 다양한 코너


명화와 유명 조각 작품에 등장한 테디 베어 미술관

테디베어 예술관(The Art) 중, 가장 흥미로웠던 곳이 미술관 코너였다.

명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테디 베어를 보고 그냥 지나치긴 아쉬웠다.

전시된 작품들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밀로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최후의 심판',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다빈치의 '모나리자', 엘리자베트 비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자식들,  밀레 '만종', 앙리 루소의 '꿈', 쇠라의 '그랑드 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 클림트 '키스'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었으니, 서양 미술사를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테디 베어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한 콘텐츠물을 감상한 느낌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테디베어 예술관에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 테디베어의 모습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지만, 세계 최고가의 테디베어인 루이뷔통 베어와 125캐럿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125K 베어를 보면, 사랑스러운 곰 인형에 이런 식으로 상업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던 곳이다.

솔직히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야, 친근하고 포근한 봉제 인형 테디베어에 대한 추억을 지니고 산다.


세계 최고가의 테디베어인 루이뷔통 베어


이 Louis Vuitton Bear는 2000년 모나코 왕실이 주관하고 크리스티 경매사가 주최한 모나코 자선경매에서 테디베어 경매 사상 최고가인 $193,477(2000년 당시 원화 229,783.793원)에 테디베어 뮤지엄이 낙찰, 현재 이곳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다.

넘치는 부를 지닌 사람들이 자선경매를 통해 부를 나누는 좋은 일을 한다면야 꼭 색안경을 쓰고 볼 이유도 없겠지만, 루이뷔통 제품을 한 개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나로선 고개가 갸우뚱거릴 수밖에...


드라마 '궁'에 출연했던 인기스타 테디베어


인기 드라마 '궁'에서 엔딩 베어로 활약했던 오리지널 테디베어도 만나볼 수 있다.

테디베어는 명화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MBC 24부작 드라마 '궁'에도 출연했다.

2006년 1월 11일 ~3월 30일까지 드라마 '궁'에 출연했던 테디 베어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일약 유명 연예인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한동안 유명세가 따랐지만, 지금은 이곳 뮤지엄에서 은퇴 후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원래 유명세라는 것도 유행 따라왔다 금세 사그라지는 면도 있으니까.



드라마 '궁'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엔딩 베어들

드라마 '궁'에 출연했던 엔딩 베어 중 가장 유명했던 알프레드


테디 베어 뮤지엄은 역사,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의 인간사를 테디베어의 역사로 재창조시켰다.

곰인형을 등장시킨 세계사는 아이들이 역사를 자연스레 익히기에도 참 좋은 아이디어였다.

어른들도 곰의 세계사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볼 수 있어 좋았다.



루이뷔통 베어와 떠나는 랜선 여행 - 파리, 모나코, 제주도

테디베어 뮤지엄에서 여행전문가를 만났다.

우리를 구석구석 유명 관광지로 안내해 주는 포스가 남다르다.

루이뷔통 베어와 함께 떠나는 세계 여행이니 출발부터 설렌다.

루이뷔통 베어와 함께 다녀올 여행 장소는 메모 속에,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훗날, 다시 떠나게 될 세계 여행을 위한 자료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자, 랜선 문화여행 출발!

우리 여정은 설렘으로 시작했지만, 솔직히 처음엔, 파리 기차역에서 명품으로 치장한 루이뷔통 베어를 만나니, 거리감이 많이 느껴졌다.

이곳 루이뷔통 베어는 귀화한 우리나라 베어다. Louis Vuitton Bear는 2000년 모나코 왕실이 주관한 크리스티 자선경매에서 테디베어 경매 사상 최고가인 $193,477(2000년 당시 원화 229,783.793원)에 테디베어 뮤지엄이 낙찰, 지금은 제주도 테디베어 뮤지엄에서 살고 있다.

세계적인 루이뷔통 베어이니, 그러려니 하고 만났지만, 함께 여행하는 내내 친절한 곰의 성품도 명품이었다. 어느새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는지 의사소통도 잘 됐고. ^^

루이뷔통 옷과 모자와 가방은 경매 낙찰받을 때부터 원래 그의 것이었으니, 명품으로 따로 치장 한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명품 스타 BTS도 2021년 4월, 루이비통의 글로벌 앰버서더였던 게 기억난다.


테디베어와 함께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는 랜선 여행!

사진출처: 구글 지도 / 픽사 베이 무료 이미지 - mini worldlocomotive

파리는 패션, 미식, 예술과 낭만이 넘치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다.

올해는 파리 올림픽(2024. 07. 18 ~ 26)과 패럴림픽(08. 28 ~ 09. 08)이 열린 도시이다 보니, 더 많은 관심이 갔다.

루이뷔통 베어와 우리는 파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채 기차에 올라탔지만, 명품 베어와 함께 떠난 랜선 여행이니, 행복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여정은 미지 세계로 향한 두려움도 모두 떨쳐내게 했다.

이제, 모나코로 출발!


아름다운 지중해 코트다쥐르 '하늘 아래 천국'인 곳, 모나코 공국


유럽은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수 있으니 더 낭만적이다.

모나코로 가기 전, 남 프랑스 니스에 들려 아름다운  해변을 둘러보고 나서, TGV 열차로 모나코에 가면 최고다.



모나코는  아름다운 지중해 코트다쥐르로 '하늘 아래 천국'이라 불리는 공국이다.

제노바 명문가 그리말디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도시 국가로 13세기 대 프랑스 무역기지로 발전했다.

그리말디 가문은 1419년 돈을 주고, 제노바로부터 모나코 영토를 사들였다. 원래 프랑스 망통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이 모두 모나코 영토였지만,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침략받기도, 보호받기도 하며 국가로서 생명력을 이어왔다.


사진촬영: 2019. 03 에르퀼레 항구(Port Hercules) / 사진 출처: Pixabay.com - 몬테카를로 카지노


몬테카를로 카지노는 프랑스혁명 이후, 모나코가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세워진 곳이다.

이곳은 도박뿐 아니라 사교장의 기능도 갖고 있다.

모나코 국민의 99%가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이라고 해요. 순수 모나코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도시국가 모나코는 발달한 산업도 없는 작은 나라다. 국방, 통화, 언어 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와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외국인들이 모나코에 들어와 사는 걸까?

바로, 모나코 국민은 '소득세 면제'라는 대단한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다 소득세까지 면제라니, 유럽 부호들이 사랑할 만한 '하늘 아래 천국'임에 틀림없다.

모나코는 세계에서 백만장자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전체 인구의 30%가 백만장자라고 하니, 저절로 입이 딱 벌어진다.


몬테카를로 키노 전시관 코너


이번 여행에서는 2000년 아트리움 전시회에도 참석할 수 있어서 더 뜻깊었다.

우리는 루이뷔통 테디베어와 함께 4년 전 10. 03~ 10. 13에 열렸던  몬테카를로 키노 전시관으로 시공간 여행을 한 셈이다. 레드 카펫을 밟고 멋지게 워킹하는 루이뷔통 베어를 바라보며, 축제의 즐거움도 누렸다.


이제 테디베어 친구들과 항해를 시작한다.

어디로 향하는 항해일까? - 바로 대한민국 제주도를 향한 항해다.

루이뷔통 베어의 집인 제주 테디베어 뮤지엄을 향해 출발!

시원한 바닷바람을 품으니 기분이 더 좋았다.

문득, 영국 가수 로드 스튜어트의 'Sailing'이란 흘러간 팝송이 생각났다.

'I am sailing I am sailing home again 'cross the sea

I am sailing stormy waters to be near you to be free

I am flying I am flying like a bird 'cross the sky

I am flying passing high clouds to be near you to be free

Can you hear me? Can you hear me?..... '



드디어 세계 평화의 섬, 제주도 도착


제주특별자치도 기원은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간다.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했던 선조들은 타제석기, 골각기 등의 유물을 남겼다.

이후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 마제 석기, 토기, 옹관묘 등이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탐라국(제주의 옛 명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도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고 한다.

이런 관계는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탐라국은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 고려 행정구역인 탐라 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한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할을 했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테디베어들


제주 마녀의 언덕, 제주 올레길 8코스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바다 풍경


제주 4.3 사건은 3만 명 넘는 민간인이 희생당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직까지 이름조차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무려 7년 7개월 동안 진행된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이며, 사망자 수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됐다. 이는 당시 미 군정과 이후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노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이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 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으로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진상을 정확히 밝히고, 희생된 분들과 그 유가족들의 상처를 평생 보듬어주어야 할 국가의 의무가 아직까지 다 진행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남아있는 사건이다.


*제주 4ㆍ3 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 자료출처: 나무위키


4.3 사건 이야기로 제주 집에 돌아온 루이뷔통 베어도, 우리도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아픈 역사는 더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치욕의 역사까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똑같은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니까.


루이뷔통 베어도 실내복을 갈아입었다.


루이뷔통 베어가 제주 뮤지엄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과 이웃들이 모두 반겨준다.

오늘 밤은 모두들 항해의 피로가 다 풀리도록 숙면 취하길 바라면서...



테디베어 뮤지엄 Shop

봉제 테디베어와 생활소품 및 액세서리 판매

키가 130cm에 이르는 컬리 브라운 점보 베어부터 테디베어뮤지엄만의 다양한 테디베어를 만나, 마음에 드는 베어를 구입할 수 있다.  

많은 테디베어들 중에는 드라마, 영화, CF에 출현했던 유명한 연예인 테디베어도 있다.

테디베어 뮤지엄 샵에서 다양한 정품 테디베어 봉제인형은 물론 티셔츠, 가방, 문구, 핸드폰 줄 등 실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소품과 액세서리를 팔고 있다.

할미는 우리 꾸미가 고른 테디베어 가방을 한 개 구입해서 선물했다.

꾸미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손녀와 할머니가 된 것만 같았다.


왼쪽 사진, 테디베어 가방 인형을 들고, 자기가 엄청 좋아하는 인형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세젤귀 꾸미
왼쪽 사진: 스티브잡스와 오드리 헵번


어린아이 품에 안겨 있는 귀여운 곰 인형 ‘테디 베어’가 살아온 이야기도 100년이 넘는다니, 테디베어들이 살아온 세월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주 둘러보았던 테디 베어의 이야기(역사)는 우리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해오지 않았던가.

테디 베어는 늘 긍정적인 모습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과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곰 인형을 예뻐했던 사람들은 이미 한 세대가 싹 바뀌었지만, 테디베어들은 늘 여전하니, 인생은 짧고, 테디곰의 생은 길고도 길구나!



http://www.teddybearmuseum.com/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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