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문장은 70년대 문화방송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채널에서 했던 코미디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문장이 유행된 것은 오히려 그 프로그램보다 인문학 강의 혹은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라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문장은 좋게 대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나쁘게 대할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 우리의 고유 속담이다. 그렇다 이번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의 두 번째 키워드는 웃음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고 우리는 이런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나름의 열심을 갖고 치열하게 살았지만 나이가 들며 혹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그들 역시도 한 때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 역시 그들처럼 살아 보겠다.’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롤 모델을 만들곤 한다.
지금이야 다양한 형태의 채널을 통해 내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얻지만 내가 어렸던 3~40년 전에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T.V. 와 라디오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에는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면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T.V 앞에 모였었는데 나이, 성별, 위치 등등 저마다 많은 것들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함께 T.V를 보며 웃을 수 있었으니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T.V를 보던 중 ‘사랑은 000’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두 집안의 여러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그중 한 집안 막내아들의 웃음소리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어린 내 눈에는 참으로 멋있게 보였고 나도 저런 웃음을 가지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이제 스물을 지나 첫 사회생활을 하던 중 소심한 성격 탓인지 그렇게 까지는 큰소리로 웃을 수는 없었지만, 될 수 있으면 웃음과 미소로 모든 일들을 맞았지만 웬걸 그랬던 나에게 들려오는 반응은 ‘내 말에 비웃는 것이냐며 정색하는 모습’ 난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어쩐 일인지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사회적 지위도 위의 사람이었었는데 그랬으니 이는 당시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 그 자체였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좋으면 아니 잘 웃으면 우습게 본다고 했던가! 웃으면 웃을수록 사람을 쉽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 때로는 내가 상황과 분위기에 맞지 않는 그런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던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것 말이다.
전 함께 일했던 동료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그는 정말 내가 T.V에서 봤던 그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랬던 그가 그 모습이 좋게 보였는지 상급자와 가까운 다른 보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그 후부터 점차 웃음을 잃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 잘 웃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어느덧 나 역시도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잊어가는 그때의 모습들과 잃어버린 웃음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아쉽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