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RKER Dec 24. 2024

3부-2 여름이야기 ‘가늘고 긴 것을 바랐던 시간 들’

그곳에서의 42개월 나는 무엇을

하루를 못 버티고 도망가던 복지사들이 있던 곳에서 3년 하고도 6개월을 보냈으니 그것 참~! 내가 생각해도 징글징글한데 – 전 직장에서도 3년 –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마음으로 일했을까?


시간이 지나며 지금은 많은 것들은 잊었지만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 여기에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먼저 내가 사회복지사라는 이름을 갖고서 처음으로 다녔던 곳은 불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시설이었으며 그곳의 원장으로는 스님이 계셨다. 불교와 스님. 여기서 연상되는 것이 있지 않은가? - 자비와 연민 – 그래서였을까? 당신께서는 거주 장애인들과 직원을 포함한 약 230인의 매일매일의 식사를 위해 사찰을 다니시며 시주를 받아오시기도 하였었다.  혹자는 어차피 시군구에서 예산이 나오는데 그것이 머가 대단한 것이냐며 반문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예산 삭감의 1, 2순위는 국방과 사회복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것으로 그 많은 인원이 어떻게.




그리고 나 역시도 시야가 넓지 않았던 그때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으며 그것은 그분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고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고 보니 다른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겠구나! 그것도 기관의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이 현장에서 있는 장애인과 직원들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더욱더.




인상에 남은 것 중 또 따른 하나는 불교시설임에도 식사 때에 종종 고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 불교와 육식 – 서로 상충되는 단어인데 “나는 안되어도 다른 사람들은”이라는 마음이었을까? 스님이었음에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기적으로 고기 후원을 받아 모두의 배를 부르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원장 스님이 드시지 않았던 것은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도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살아오며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말이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우리는 많은 종교 시설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손길들을 내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 시설일수록 각각의 굳건한 가치관이 있고 이에 따라 생활하도록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특정 가치관에 대해 종용한다는 것이 종교 시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시설을 운영하며 직원은 물론이거니와 거주 장애인들까지 자기의 생각대로 – 이런 분들일수록 귀를 막더라 - 생활하게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하나 더, 어느 날인가 회의 시간이었다. 원장 스님께서 이야기 중이었는데 여기서 콜록 저기서 콜록 갑자기 흐르는 정적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당신께서는 조용히 그리고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셨다. “내 몸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돌본다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냐며” 당시 나에게 있어 이는 큰 충격이었다. 48시간 동안 일을 했으니 퇴근 후 쉬는 이틀은 해방감에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직장이 – 기관 – 그래서 그곳의 장애인 분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을 어찌.




지금의 정리 정돈을 기반으로 하는 청소 실력과 부지런함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감자, 무, 배추 등을 심고 관리했던 영농활동에 매해 11월이면 월례 행사로 했던 김장. 이를 꼭 해야 한 해를 마무리 짓는 것 같다며 함께 생활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보통으로 배추가 6000 ~ 7000 포기 많을 때는 8000 포기를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지만 그로 인해 어떤 일도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정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내가 사회복지를 시작하며 들었던 가장 많은 말 그것은 좋은 일 하시네요’였다.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겠는데 조금 과장되게 덧붙인다면 만나는 사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그런 말을 하며 여기에 말뿐이라면 그나마 괜찮겠으나 무언가 측은 하다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까지 지었으니 아마도 이는 “그 일 해서 먹고살 수는 있겠어”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당시 초보 사회복지사였던 나에겐 별다른 대꾸의 말은 못 한 채 그저 네, 네 하며 사람 좋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나기를 여러 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직업으로 선택을 한 것이고 응당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고 있는데 – 가늘고 길게 - 그 이후부터 이런 말들에 대해 당당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내가 받는 급여와 연봉을 이야기하면 나를 보던 측은한 눈들은 크고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과 장애인 복지 분야에서 생활 재활 교사로서 업무를 담당하는 후배 복지사들에게 이야기한다. 기관에 대한 애사심과 충성심 같은 것은 바라지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받는 돈만큼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60년대, 70년대, 80년대 그리고 아마도 90년대까지 사회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사회복지 기틀을 만들었던 분들누가 알아주지도 특별한 보수를 받지도 않은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그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