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하고 어느덧 7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를 맺을 수는 있을까? 아니 잘 풀어낼 수는 있을까? 하며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색하게 어느덧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온 그 시간을 잠시 되돌아본다면
1부 내가 이 세상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
2부 몸과 마음의 상처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
(누구나 그렇듯 희미해질 뿐 지워지지 않는 그것)
3부 부모님의 품속에서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마주하게 된 사회 속 이십 대의 이야기
4부 좀 더 나은 변화를 꿈꾸며 뛰어들었던 삼십 대 그 두 번째 이야기 이제 시작합니다.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 하나 달랑 들고 겁 없이 뛰어들었던 장애인 거주시설 그곳에서의 시간은 천국과 지옥의 공존이었다. 갑자기 천국과 지옥이라니 어딘지 오들거리는 이 느낌! 그리고 드는 생각 한 조각 ‘이 봐 무슨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우리 내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다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아마도 모두의 생각이 위와 같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있어 이보다 더 명확한 단어는 없지 않을까.
새롭게 변화된 환경 속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매일 매일의 실적이라는 압박 속에서 해방되었다는 것과 내 삶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일과 삶의 공존이라는 워라벨(Work-life balance)이 이야기되지만, 예전 그때에는 기본 주5일 근무에 월 2회씩은 6일 근무였던 것이 이곳에서는 48시간 근무라고는 하지만 48시간을 쉴 수 있었으니 결국 15일 근무에 15일 휴무. 그러니 나는 더욱 부지런히 한 걸음 더 그리고 보다 세심히 꼼꼼하게 움직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많은 직장인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간관리자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본다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운전밖에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 누울 곳을 찾고 그것이 충족되어 지면 이불이 있었으면 좋겠고 또 또. 사람의 마음이라고 지칭되는 그것이 왜 그리도 간사한지 모르겠다. 분명 힘들었던 많은 것이 해결되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불만이 쌓여만 갔으니, 그것은 역할과 직급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이는 이후 나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제였고 어찌 보면 그 시작은 여기부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나은 것이 그렇게 없어 보이는데 나를 앞지르는 후임들.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높고 낮음이라는 프레임(Frame) 속에서 판단되는 사무실의 행정업무와 거주실에서의 돌봄(Care) 업무에 대한 지극히 이분법적인 구분. 편한 것에 반대하는 힘든 것이 있음은 어찌 본다면 당연한 논리인데 아직은 뜨겁던 시절 그때 나는 이직을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인요양시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꿈을 갖고 들어간 곳은 치매 어르신 80여 명이 요양보호사님들의 지원 속에서 생활하시는 곳이었고 나의 직급은 과장. 사회복지사로서의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호봉제로 받던 급여가 연봉제로. 말이 좋아 연봉제이지 결국 원장이 주고 싶은 데로 그렇게 이전보다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곳의 원장님은 동시에 목사님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대단하다기보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겠으나 젊어 공직 생활을 하였고, 정년을 앞두고서는 목회와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노인 요양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무엇하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다수의 기독교 시설이 그러하듯 수요일에는 원내에서 종교행사를 진행하였고 주일에는 일부 어르신들과 교회에 갔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위하여 함께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양로원에 갔으니, 그것참 시설이 많기도 하다. 이에 더하여 나의 본 업무인 요양보호 및 사회복지 실습생과 자원봉사자 관리, p.g. 계획 및 진행, 입*퇴소가 동반된 어르신 상담까지. 혹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종교시설로서의 색채가 그렇다고 사회복지사업을 담당하는 노인복지시설로서의 그것도 아닌 어딘지 애매한 느낌이려나.
더군다나 내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려면 원장님께는 위로 올라가 어르신들 손이라도 잡아주며 말벗을 하라고 했으며 나중에는 내가 미덥지 않았는지 중간관리자로 일하고 있던 직원(처제)가 직접 볼 수 있는 위치로 나의 책상과 컴퓨터의 위치를 옮기었으니 이건 머 감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물론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원장님께서는 모든 일을 잘하고 싶었고 그에 비하여 나의 역량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있었던 11개월의 시간이 그렇게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회복지사 본연의 임무에 있어 최선을 다했으며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도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밖에서 볼 적에는 연세도 있으시고 상당히 점잖으신 분이셨는데 어르신들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듯 각설이 분장을 한 채 재롱을 피우셨던 요양보호사님의 이야기, 한 번 흥이 오르면 여느 가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정말 맛깔나게 노래를 부르셨던 어르신의 이야기, 결국 아이와 함께 오기는 했지만 아이 대신 자신이 와서 대신하고 봉사 점수를 받을 수 없겠냐며 상담했던 어머님의 이야기, 학교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기관으로 봉사를 온 아이들의 이야기,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그날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던 사회복지 실습생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실습생들이 정말 실습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현장 점검을 왔던 학교 교수들의 이야기, 어쩐 일인지 내가 실습생을 관리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것들이 보기 싫었었는지 자신이 실습생 관리를 할 수 없냐고 물었던 중간관리자(처제)의 이야기, 요양보호사 실습을 위하여 센터 실장과 이야기하던 중 나에게 기본 시간만 이수하면 된다며 자격증을 따라고 권유했던 이야기(따지 않았음에 후회막급)
이렇게 본다면 비록 받는 급여는 적었고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던 듯하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있었던 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따뜻한 시간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특별히 기억하는 것 하나가 있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어느 날 있었다. 그날도 어르신들과 말벗 시간을 갖기 위해 준비하며 기록지를 보던 중 눈에 들어오는 한 분. 그분은 치매 정도가 심하지 않았음에도 가족들에 의해 입소하게 되었는데 요양보호사님들의 이야기로는 가족의 방문도 점차 줄어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분이 중요하겠지만 아무래도 보호자의 방문이 적은 분들을 중심으로 하겠노라는 마음을 갖고 인사를 하며 다가가는 데 그때 들리는 목소리 “여기 머 하러 왔어.” 이때는 그 의미를 모른 채 사람 좋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건넸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식들도 찾아오지 않은 그렇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늙은이인데 나이도 젊은 청년이 왜라는 가슴 저리는 외침은 아니었을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퇴사하며 “어머니 저 이제 갑니다.”라고 인사 했을 때 환하게 웃으시며 “잘 가!”라고 하셨던 그 분.
많은 것들이 좋지만도 그렇다고 나쁘지만도 않았기에 계속 다니려고 했었는데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르신 80명은 사회복지사 한 명이 감당하기에는 결단코 적지 않은 숫자였는데 이에 더하여 주간보호시설, 요양원, 공동생활가정 1, 공동생활가정 2라는 이름으로 각각 나누어진 시설들. 퇴사를 마음먹기 전 기관평가를 앞두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공동생활가정의 원장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누구는 어느 시설의 국장, 누구는 원장 등등으로. 물론 긴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러지 않겠으나 이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1회 p.g.을 진행하고서는 5장의 각기 다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점. 이렇게까지 되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또 나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만 것이었다.
요양 시설로 옮기기 전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라고 이야기하셨던 어머니. 만약에 이때 일 년 정도 쉬면서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좀 더 여유를 갖고 돌아보았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에라도 쫓기는 듯 직장을 알아보았으니 그것참!
주변을 보면 누구는 일 년, 이 년 각종 수당을 받아 가면서 잘 쉬던데, 나에게 있어 왜 ‘쉰다.’라는 말은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었을까? 잠시도 쉬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하셨던 아버지 그에 따른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십 대에도 그랬는데 나이 서른이 넘어 어머니에게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 모두가 답일 수도 혹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순간 떠 오르는 그것은 (젊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젊어서는 젊기에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는 나이가 들었기에 쉴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