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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KER Jul 02. 2024

2부 봄 이야기 '나의 어린 시간 들'

트라우마(만약에 심리치료를 받았더라면...)

아버지는 30년대 후반, 어머니는 40년대 중반, 나와 4살 터울의 형님은 70년대 초반 그리고 나는 70년대 후반... 그렇다! 이것은 우리 가족의 출생 연도이다.

그런데 머랄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것이 이는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 혹은 고모와 어린 조카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지금이야 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하여 그럴 수 있겠으나 어릴 적 친구들의 가족을 볼 때면 확실히 특별나게 보였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나도 한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만약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난감하기만 할 것 같은데... 우리 형제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그 이유에 관해 이야기 하시 길 원래는 형과 내 위로 아이가 있었는데   '유산이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어린 나에게 그 말들은 큰 의미가 없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알지 못했다. 그저 스쳐 가는 소리였을 뿐...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만약 유산이 되지 않았다면...

혹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대에 태어나지 않았던 나는 지금과는 다른 어떤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일지 불행일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린 나를 보며 어떤 생각하셨을지 궁금하기만 한데... 뜻하지 않은 유산의 경험으로 인하여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라셨을까? 형님에게만 주판 가르쳐주신 것을 볼 때 확실히 그러한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계산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라고 하여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보고 경험하신 것들에 대해 훈육이라는 이름의 강요를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임에도 어린 나에게 화를 내시거나 얼굴 한 번 찌푸린 적이 없으셨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나도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워 보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내 어린 시절을 한마디로 정의해 본다면 천방지축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참 그러한 게 좋게 말하면 명랑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주의가 산만한 것이었으니 내가 잃어버린 실내와 주머니만 하여도 수 켤레요 신발가게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은 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 생활도 ‘산만함’ 그 자체였고 결국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는 나를 데리고 보습학원이라는 곳을 찾으셨으며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구성원들과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 나의 10대를 좌지우지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때는 국민학교 5학년 00 공원으로 소풍을 갔었다.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김밥과 간식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모든 활동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거기까지 그리고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횡단보도가 아닌 길로 가다가 버스와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블랙박스와 CCTV가 있지만 이것이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는 나는 무단횡단을 한 것으로 되었고 별다른 보상금도 받지 못한 채 약 8주간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내가 천방지축이었다고 하여도 차도와 인도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평생 눈물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이셨지만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는 나를 보시며 우셨다고 하니 정말이지 큰 사고였던 것 같다."          




당시 소풍의 거리가 아이들의 걸음걸이로는 멀고 차를 타기에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자식에게 있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이었을까?

나에게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는데 나는 고집을 피우며 이야기했다. '다들 걸어가는데 창피하게 왜 나만 그래야 하냐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철없는 어린 꼬맹이의 눈에는 왜 이리도 그것이 싫었었는지 모르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은 벌어졌고 1~2년만 먹으면 되는 약을 4~5년 동안 먹었으니 이 역시 어린 나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쉬는 날이면 어린 자식을 위해

약을 타러 병원에 다니셨던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그리워진다."          




퇴원하고 학교에 가며 모든 것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것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는데 다니던 학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었다. 그 이유가 참 그러한 것이 병문안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서야 생각되는 것이지만 당시 어린아이의 의견을 한 번이라도 물어보았으면 어땠을까? 진정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았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어른들의 가치 판단에 따른 변경이었고 그렇게 별생각 없이 던져진 이기적인 조약돌은 이후 내 삶의 큰 변화를 불렀으며 이는 트라우마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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