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나침반 part 1
1937년생인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가정사로 인하여 대학에는 가지 못하셨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은행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특별한 가정사 때문이었을까 당시에 할머니와 집에서 나와 따로 생활하셨다고 하니 아마 내가 모르는 어떤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중매로 두 분께서는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은행원으로서 단정하고 바른 모습이 복장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멋쟁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 8살이나 나는 나이 차이와 또 다른 중매 자리가 있었던 탓에 어머니께서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모든 일이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다 사람 잡겠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는 또 다른 어려움의 시작이었다.
당시 시대 상황은 군부독재 시절이었고 군대에 다녀오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은행에서 '해고한다.'라는 내용의 통보를 받으신 것이다. 관련하여 아버지께서는 군대를 안 간 것이 아니라 통지서가 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고 이 억울함을 당시에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석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를 통한 시집살이는 정말 힘든 어머니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는데, 맵다! 맵다! 시어머니를 통한 시집살이가 그리 매울까! 공장에 다니며 생활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제 갓 돌이 지난 형님만(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둘러메고 서울로 상경한 어머니께서는 간단한 생활 도구만 챙긴 채 급하게 어머니의 뒤를 따라온 아버지와 다시 무일푼의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만약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께서는 올라오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른 누구보다 특별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강한 생활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셨으며 그 덕에 우리 식구들은 배고프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의 집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집을 사고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달고서는 두 분께서는 기쁨에 밤을 새우도록 이야기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니 비록 어머니께서 많은 공부를 하지는 않으셨지만(외삼촌께서는 어떻게든 공부시키려고 하였지만 싫으셨다고 한다) 적은 살림의 가정을 맡아 잘 일군 경제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다.
시집살이로부터의 해방 때문이었을까? 비록 무일푼에서 다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얼마 후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고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으니,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닌 마음의 평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