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나침반 part 2
그렇게 사회*경제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지만 쉬지 않고 일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어머님의 강력한 의지의 결과물로서 우리 형제의 간식을 위한 라면땅 1박스와 밀가루 한 포대를 구매할 뿐 모든 돈을 은행에 두고 필요할 때만 찾아서 생활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던 그 시절 함께 살았던 이웃과는 확연히 다른 생각과 삶을 사셨는데, 그래서일까?' 지금 나의 경제관념과 씀씀이는 이러한 당신의 모습 속에서 형성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시절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어머니께서도 공장에 나가 일을 하며 가게에 보탬이 되고자 하셨던 듯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버지께서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아이가 돈을 달라고 하면 잘 챙겨주어야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가정에 충실하길 바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당시 시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는데, 6.25를 겪으며 부모의 손길 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당신만의 특별했던 삶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식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무척이나 각별하셨다는 것과 그 큰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좋은 일인데,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좋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나는 한글을 모른 채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물론 학습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은 사전 교육이 없어도 잘했을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지나지 않아 선생님으로부터 보호자 상담 연락이 왔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자고 일어나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니 이에 신경을 쓰다 보니 미처 학습에 신경을 쓰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하게 되었고 학교 역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하얀 도복에 색색이 허리띠를 매고 다니는 녀석들을 보면 무척이나 부러웠음에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고 국민학교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입학을 한 천둥벌거숭이였던 나.
어머니 품에 안겨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고 손을 흔들며 어머니 등에 매달린 채 동네에 나가면 다른 녀석들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침을 흘리지만 사달라고 떼를 쓰지는 못하는 착한(?) 아이였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