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새롭게 들어간 학원은 이전의 내가 공부하던 곳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는데 이전에 다니던 곳은 마치 옆집 아저씨와 같은 모습의 선생님에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반면에 지금의 이곳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좀 더 신사적인 느낌의 선생님 하지만 아이들은 나 포함 2명 이 역시 나중에는 나 혼자만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은 무엇을 하였고 얼마를 다녔는지 기억에 없을 만큼 희미한 시간이었으며 그렇게 내 국민학교 6년의 시간 역시 끝나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옷과 그에 함께 하는 장신구들 지금이야 피식하고 웃지만, 그 시절 어린 나의 눈에는 그것이 얼마나 멋있고 설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교복을 맞추러 간 추운 겨울의 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상담실로 부르셨다. 하지만 그 당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나의 한 손에 음료수 한 병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런데 왜 보호자가 아닌 나를 불렀고 그래서 선생님은 무엇을 알고 싶으셨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년 전에 일어났던 사고의 상황이었을까? 아니면 사고를 당한 아이의 학교생활의 적응 여부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어린 학생이 아닌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어땠을까?
“인생에 있어 만약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혹 그랬다면 이후 나의 학교생활이 좀 더 수월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나는 다시 학원이라는 곳을 갔고 젊은 수학 강사에게 부족한 아들을 부탁한다며 연신 허리를 굽히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한데 그래서였을까? 내 학교생활 중에 이때만큼 비친 듯이 공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험 때가 되면 저녁 12시가 넘어 집에 오는 것은 기본이요 다시 새벽에 나가 공부를 하고 학교로 시험을 보러 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렇게 조금씩 성적이 오르며 재미를 붙여가던 중 교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나의 그러한 모습을 본 아이들은 매우 놀랐고 함께 수업할 수 없다고 했다니 이 말에 어머니는 매우 놀라신 듯했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려고 동분서주하셨고 나는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나의 의사와 상황은 고려되지 않은 채 학교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만두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말 한마디 못 한 채 말이다
그리고 겨우 연합고사를 보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미 나에게 있어 학업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목적도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산 송장과 같았다고 할까! 정말 많이도 울었고 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었다. 난 다시 천둥벌거숭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혹자는 어려움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도 미성숙했으며 그 순간을 이겨 낼 방법도 알지 못했다.
삶이라는 모든 순간이 좋을 수도 그렇다고 나쁠 두고 없겠지만 적어도 나의 시간은 좋지 않은 기억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차라리 대상이 있었다면 한순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끝나면 될 것을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기에 그렇게 끝나지 않는 굴레 속에서 힘들어했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의 학창 시절은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