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았던 신학생의 꿈 part1
함께 했던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 복무 중이었던 형님은 다시 부대로 복귀하였고 그렇게 남겨진 어머니와 나 우리 두 사람이 지내기에 집은 왜 그리도 크고 분위기 또한 을씨년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얼마 전까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기에 더욱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다.
평생을 함께하신 어머니의 슬픔이야 더할 나위 없겠으나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한 18년의 세월이 전혀 작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받기만 했을 뿐 내가 해드린 것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 생신이라고 사드렸던 맨 솔 한 보루뿐.
문어발식 확장에 따른 부실기업의 증가, 금융산업의 몰락,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도, 외환위기, 국가부도, I.M.F, 금 모으기 운동. 그렇다. 이야기하는 것은 97년도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에 일어났던 일이다.
80~90년대를 거치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눈부시게 성장했던 한국경제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정말 많은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았으며 그에 따른 자살 및 실업자 증가, 가정해체 등 큰 어려움이 있던 시기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했던가? 집안의 큰 기둥이었던 아버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니 우리 집 역시 이 여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서 고심하시던 어머니께서는 가지고 있던 패물들을 전당포에 맡기셨고 그렇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공장에 다니시길 여러 해.
"평생 공장 일인 것은 해본 적이 없으신 분이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하였으니 그 힘듦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서는 모태신앙이라고 이야기하셨지만, 모자(母子)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없었다. 내가 교회에 나갔던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마땅한 놀거리와 먹거리가 넉넉하지 않았기에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이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 나갔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처음 교회에 나가는 그 의도가 불순하기 이를 데 없겠으나 그렇다고 어린아이에게 신*구약을, 모세 5경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어찌 본다면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무언의 거래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국민학교 5학년 때일 것이다. 아는 동네 형과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고2쯤 돼 교회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무리와 장로를 중심으로 한 무리로 분열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신앙이 좋다고 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는 소식이 들리고 이에 나 역시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 교회를 나오고 말았다. 이후 목요 찬양집회, 새벽기도회를 전전하다 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가 우리 집에 우환(憂患)이 있을 때였다.
“뿌리 아니 근본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뭐라고 하든 이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다녔던 친구 녀석은 잠시 방황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긴 시간 교회를 다녔다고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나는 결국 떠돌이가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