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베짱이의 나락
천재메뚜기 베짱이인 나는 여전히 개미여왕을 도와 조직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고민하여 시스템을 만들고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미리 조치했다. 나는 일주일 중 쉬는 날 하루가 있었지만 열정적인 아니 격노하는 개미여왕이 부르면 쉬는 날도 달려가야 했다. 개미여왕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심기를 맞춰줘야 하기 때문이다. 개미여왕도 내 의견을 잘 들어주었고, 개돌이 또한 나를 잘 따라 주었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조직이 잘 운영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회사에 다니는 인간들도 누구나 회사에서 잘 나가는 시기가 있다. 회사에서 윗 분들이 인정해 주고, 부하 직원들도 잘 따라 준다. 자신감은 항상 가득 차 있고, 자신감 또한 성과로 이어진다. 원하는 것들이 착착 이루어지고, 윗분들의 평가도 좋다. 하지만 자신감이 너무 차오르다 보면 다른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기도 한다. 저급한 지능을 가진 인간들은 고의적으로 상대를 무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회사에서 인정받는 시기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든 있다. 다만. 세상의 변화와 조직 문화,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 시기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든 잘 나가는 시기(?)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을 대하는 조직원들의(윗분이든 아랫사람이든)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내 윗 선배들도 이런 시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항상 잘 나갈 것 같다가도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나락 가는 어느 순간이 온다. 그때쯤 능력 있는 내 부하직원이 조직의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 후배 녀석은 나처럼 조직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나를 점점 무시하기 시작한다. 아니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는 너무나 어렵지만 극복한다면 다시 기회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견뎌내지 못하면 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직장 생활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소설 구성의 5단계가 순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절정이 먼저 오고 위기가 온다.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제는 조직에 남아있기도 어렵다. 찬밥 신세가 되어 냉대받다가 결국 조직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조직생태계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있는 지능적인 인간들은 이런 위기가 오기 전, 자신의 몸 값이 절정일 때 다른 조직으로 최고의 몸값을 받으며 이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직을 하더라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참신한 아이디어와 신기술로 무장한 젊은 세대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옛날에 자신이 젊은 세대로 잘 나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베짱이도 이제 그런 날이 왔다. 개돌이가 많이 성장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개미여왕은 개돌이의 말을 더 많이 믿어주고, 신뢰한다. 베짱이는 메뚜기 족으로 개미와는 다른 종족이다. 하지만, 개돌이는 어떤가? 선대 개미여왕이 낳은 순혈 자기 종족이다. 개돌이도 이제 나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정이 많던 개돌이였는데, 개돌이도 이제 어린 개미가 아니다. 지능적인 어른 개미가 되었다. 개돌이도 생각이 많아졌고, 어떨 때에는 나보다 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미여왕에게 내놓기도 했다.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개미조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개돌이는 나에게 먼저 이야기했고, 개미여왕에게 보고하기 전에 내 허락을 받았었다. 이젠 아니다. 개돌이는 개미여왕과 독대하는 횟수와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 일이란 것이 발단은 이렇다. 며칠 전 내 아들 포카칩이 밤새도록 울어댔다. 어린 포카칩은 뭔가 불편하면 울음으로 표현한다. 포카칩을 안아주고, 업어주고, 핥아 주어도 밤새도록 울어대는 이 녀석 때문에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녀석 어디 아픈 건가?" 더한 것은 아름다운(?) 나비 마누라 나불나불이가 '나 몰라' 하면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다. 포카칩이 울어대는 소리와 나불나불이의 코 고는 소리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나의 잠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다음날 나는 맹한 정신과 퀭한 눈으로 중요한 업무를 대충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천재적인 조직운영으로 개미여왕의 조직이 발전했고, 개미 인구도 늘어나서 새로운 개미사옥이 필요했다. 적절한 부지를 선정하고, 개미사옥을 지을 필요인력과 자재를 이 천재적인 베짱이 머리로 계산을 해야 하는데 오류가 생겼다. 개미여왕에게 잘못된 보고를 한 것이다. 이것 까지는 어떻게든 나의 천재적인 변명으로 넘어갈 수는 있었다. 더 큰 것은 개미여왕이 침 튀기며 열의에 차서 말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잠이 쏟아져 하품을 해버린 것이다. 어쩌지? 큰일 났다.
개미 여왕은 격노했고(평상시에도 자주 격노함!) 나는 개미 조직의 운영 총책임자에서 식량 채집 1부의 부장으로 강등되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하품만 꾹 참았어도, 아휴~ 나는 식량 채집 1부의 부장이 되어 식량채집 현장을 감독하고, 생산을 독려해야 했다. 채집 1부의 개미 조원들이 아파서 나오지 못해 일꾼이 부족한 경우에는 나도 등짐을 져가며 식량을 채집하고 날라야 했다. 나이 먹고 하려니, 몸도 아파오고 더한 것은 '나는 천재 메뚜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실감'으로 내 마음은 더욱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천재 메뚜기 베짱이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흘러갔고, 매월 받는 식량배급량도 줄었다. 이것은 조직에서 이제는 당신이 필요 없으니 조용히 사라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반대로, 내 뒤를 이어 개미 조직의 운영 총책임자가 된 개돌이는 나에게 형식적인 위로만 해줄 뿐이다. 예전 개돌이를 대할 때의 그 느낌이 아니다. 그때 나는 개돌이를 진심으로 아꼈고, 인간적으로 대했다. 지금의 개돌이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이다. 내가 조직의 운영 총책임자였을 때도 다른 개미들은 나에 대해 권위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느꼈을까? 나를 뒤돌아 본다.
그리고 개돌이는 아직 모를 것이다. 개돌이 또한 개미여왕에게 언젠가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천재 메뚜기인 나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미 조직의 식량채집 1 부장으로서, 아들 포카칩을 키우며 아내 나불나불이와 근근이 먹고살아야 하는 것일까? 죽을 때까지? 난 천재 메뚜기 베짱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베짱이 이야기를 통해 깨닮음을 주고, 똑똑한 인간생활을 위한 교훈을 남기지 못하고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는 것이다. 이야기를 더 만들어 가야 한다. 베짱이는 오래 살면서 자신이 느낌 깨달음과 교훈을 남겨야 할 것이다.
'개미여왕에게 보이지 않는 핍박을 받았고, 개미조직 운영 총책임자에서 식량채집부장으로 강등되었다'라고 나비 마누라 나불나불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말할 수는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마누라와 자식을 돌보고, 가정을 유지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아들 포카칩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너무 힘들어 소파에 누웠다. 이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나비 마누라의 폭발적인 잔소리가 쏟아진다.
"씻고 누워야지, 더러운 먼지 묻은 몸으로 그냥 소파에 누우면 어떻게 해! 당장 씻어!"(버럭)
"다른 남편들은 식량도 많이 받아오면서, 집안일도 많이 해준다는데 당신은 도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야?"(버럭)
"아들 포카칩을 하루 종일 공부시키고, 집안일까지 하느라 너무 힘들었어! 지금부터 당신이 포카칩이랑 놀아줘!"
이런 우왁스런 잔소리를 듣다 보면~ "아휴 그냥, 메뚜기 마누라를 얻을걸. 괜히 나비 마누라랑 결혼해 가지고~"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부터 나비 마누라 나불나불이는 나와 함께 있을 때 웃지 않는다. 항상 지쳐 있거나 화난 얼굴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내가 힘들게 일하며 배급받아온 식량은 저축하지 않고, 안 써도 될 것을 마구마구 사면서 써버린다. 식량 아까운 줄 모른다. "알뜰한 메뚜기 마누라를 얻었었더라면~!" 아니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귀여운 우리 아들 포카칩이 있는데 말이다. 식량채집장에서 땀 흘리며 힘든 일을 하고 와서도 집에서 내색을 할 수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피곤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된다. 나불나불이의 거친 잔소리에 이성적 합리적으로 대꾸할 힘 마저 없다. 이제 집에서도 편안하게 쉴 수가 없다. 너무 지친다. 요즘에는 가끔 메뚜기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내 힘든 처지를 털어놓을 다른 벌레 친구도 없다. 나는 제 잘난 맛에 살았고,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몹시 후회된다. 잘 나갈 때는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래도 어쩔 거야. 우리 포카칩이 결혼하는 것도 못 보고, 이렇게 이른 나이에 우리 엄마 만나러 하늘나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래 다시 한번 정신을 부여잡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포카칩이 나를 보더니 달려온다.
"아빠! 엄마가 지금까지 나 공부만 시켰어. 지금부터 아빠가 놀아줘!" 내 손을 잡고 매달린다.
"아빠! 개미마불 하자! 이거 재밌어. 아니면 메뚜기인생게임할까?"포카칩이 보드를 펼친다.
"아빠! 목마 태워줘!" 내 목을 잡고 올라간다. 그리고 보드판의 말과 카드가 거실 바닥에 어질러진다. 나비 마누라는 이것을 보고 또 격노한다. "당장 치워!"
포카칩 녀석! 귀여운 내 새끼지만, 포카칩이랑 놀아주는 게 왜 이리 힘든 건지. 내가 많이 늙었나?
나불나불이와 우리 아들 포카칩! 포카칩에게 들어가는 식량이 많아졌는데, 어쩌지? 이제 다시 개미여왕의 총애를 받아 개미조직의 중심으로 올라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조만간 개미조직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이다. 어쩌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한 개비 피우며 고민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천재 메뚜기 베짱이다. 이런 다채로운 어려움도 천재인 나는 이겨낼 수 있다.
난 우리 아들 포카칩이 있잖아~
고민하자!
생각하자!
계획하자!
행동하자!
해결하자!
나는 천재 메뚜기 베짱이다! 아뵤~~~~
이렇게 외쳐 보지만 마음이 더욱 슬퍼지는 것은 왜일까? 갱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