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베짱이는 개미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다.
며칠 동안 나 홀로 고민했다. 이런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벌레친구가 없다. 벌레 친구가 있더라도 자존심 강한 내가 조직에서 찬밥대우받고 있다고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혼자 담배 피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난다.
나는 더 이상 개미여왕의 개미굴에서 셋집 살이 하는 것은 이제 어렵다고 생각했다. 개미여왕도 개돌이를 더 아끼고, 나에게는 찬바람이 쌩하며 냉담했다. 전 편에서 말한 것처럼 개미여왕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을 때, 내가 하품을 해버린 사건으로 식량채집 1 부장으로 강등되었다. 일도 힘들어졌고, 식량봉급도 줄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식량채집 1부의 조직원들도 나를 꼰대라며 무시하는 게 느껴진다. 이젠 결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선 내가 정말 정말 사랑하는(?) 내 마누라인 예쁜 나비 나불나불이와 대화를 했다.
"내가 개미조직에 계속 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
"왜? 개미여왕이 괴롭혀? 아니면 나가래?"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아무리 천재이긴 하지만 결국 메뚜기자나. 너도 나비이고. 개미도 아닌 벌레들이 개미굴에서 생활하는 게 맞지는 않잖아"
"그러면 우리 아파트로 이사 가는 거야? ㅎㅎㅎㅎ"
나비 마누라 나불나불이가 기대에 차서 묻는다. 여자들이란! 고급 아파트와 명품 가방이면 뭐든 OK라니까.
"아니! 아파트보다 더 좋은 곳! 집을 지어서 이사 갈 거야. 좁은 개미굴에서 사는 게 좁아서 많이 힘들었지? 이제 우리가 살만한 큼직한 집을 짓자.
"우와~ 정말? 인스타 아니 벌레스타에 자랑해야겠다."
그놈의 벌레스타는~ 아휴!
"사람이 하면 인스타, 벌레들이 하면 벌레스타!"
요즘 벌레들에게 SNS는 너무나 중요한 소통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을 자랑질하는데 쓰인다.
명품가방을 남편벌레가 사줬다는 둥!
인테리어를 값비싼 유러피안 제품으로 했다는 둥!
멋진 곳으로 해외여행을 갔다는 둥!
자기 아이가 수학시험을 100점 맞았다는 둥!
우리 아들은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걸었다는 둥!
정말 자랑할 게 없으면 남편 자랑질이라도 한다. 내 남편이 대기업 다니고, 받아오는 식량봉급이 엄청 많다는 둥!
다른 벌레들이 올린 사진과 글들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을 돌아본다. 나는 왜 이런 거지 같은 집에서, 못난 남편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거지? 집 나가는 벌레 마누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벌레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인간들도 비슷하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비교대상은 내가 살고 있는 이웃 정도였다. 아주 잘 사는 집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잘살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힘들 땐 도와주고, 슬픈 일이 있으면 위로해 주었다. 그게 "한 지붕 세 가족" 드라마가 있었던 시절, "응답하라 1988" 시절이다. 이웃 간에 정도 많고 사이도 좋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겪은 후 많이 변했다.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기업들의 근로자들에 대한 해고가 쉬워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높은 시민의식으로 단기간에 국난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IMF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에 따라 양극화는 점점 심각해졌고, 지금도 빈부격차는 커지고 있으며, 가난의 대물림과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없어졌다. 선천적으로 날개가 자랄 수 있는 아주 극히 일부의 재능 있는 족속들만이 날아올라 상류층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대부분의 성실한 개미 같은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기술적으로 발달한 다기능 다목적 기계가 출현함으로써 사회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정보의 접근성이 편리해졌고, 우리는 언제든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법의 기계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내가 잘 알지도 못한 인간들의 자랑질하는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보이기 위해 무리하여 고급 외제차를 구매하고, 명품 가방으로 치장한다. 인간들의 자존감은 점점 떨어져 바닥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많은 뻘짓을 하고 있다.
예쁜 집과 명품 가방만 생각하는 허영심 가득한 나비 마누라는 예쁜 집을 지어 이사 가겠다는 말 한마디로 설득은 마무리되었다. 여자들이란~~~ 참 쉽네~
이제 한 고개 넘었다. 하지만 한 고개 넘었을 뿐이다. 아직 스무고개가 남아있다.
어디에 살집을 지어야 할지, 이사를 가야겠다고 개미여왕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개미여왕에게 얼마나 대출식량을 받을 수 있을지, 이자는 얼마나 내야 하는지, 내가 장사할 매장은 어디에 얻어야 하고, 어떤 장사를 해야 할지, 대출식량은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이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나비 마누라는 이사 간다는 설렘에 기분이 좋은가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나비 마누라가 나와 포카칩에게 성질을 덜 내서 가정의 평화(?)가 왔다.
나는 개미여왕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개미집을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여왕님! 여왕님의 보살핌으로 제가 추운 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예쁜 나비 나불나불이와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아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가 조직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식량채집부장으로 강등되어서 나에게 이러는 것이냐? 그렇다면 네가 지금까지 조직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발전시킨 공을 인정하여 내 비서실장이나 네가 원하는 곳에 배치해 줄 수 있단다. 베짱이야" (사실일까? 예의상 말하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개미는 개미끼리 사는 것이 맞고, 메뚜기는 메뚜기처럼 살아야 세상의 이치에 맞는 것 같습니다. 개미 조직을 떠나 메뚜기 본연의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쩔 수 없지.(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직을 떠나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해 봤느냐? 철두철미한 베짱이인 만큼 아무 준비 없이 이 조직을 나갈 것 같지는 않구나!"
"예. 저는 우선 개미굴을 떠나, 메뚜기들이 사는 동네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이사를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장사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목 좋은 곳에 매장을 만들어 벌레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들어 팔려고 합니다."
"천재메뚜기 베짱이가 하는 일이니 잘 되겠지. 그런데 집을 짓고, 장사를 할 만한 밑천은 모아 놓았느냐? 처음 시작할 때는 저축해 놓은 식량이 많이 필요할 텐데~"
"저축해 놓은 식량은 거의 없습니다. 나불나불이가 식량을 아끼는 스타일도 아니고, 아들 포카칩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해서 모아놓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퇴직금 아니 퇴직 식량을 좀 받고, 여왕님께 식량대출을 좀 받는 다면, 살 집을 짓고 장사를 할만할 것 같습니다. 여왕님께 대출을 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래, 내가 천재메뚜기 베짱이 덕분에 큰 조직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도 마음을 좀 넓게 쓰려고 한다. 퇴직금 아니 퇴직식량을 좀 넉넉하게 챙겨줄 것이고, 식량대출도 5% 정도의 이율로 저렴하게 대출해 주마. 집을 지을 때 내 건설부 직원들을 파견해 집 짓는 것도 도와줄 것이고 장사할 매장 인테리어도 저렴한 금액으로 도와주도록 하마!"
"여왕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개미 여왕도 잔소리 많이 하는, 아니 충언을 많이 하는 내가 사라지는 것이 시원한가 보다.
드디어 개미여왕에게 출사표(出辭表)를 던졌다. 사표를 내고 나가겠다고 했으니까 출사표지. 퇴직의사와 함께 개미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했다. 누구나 자신이 속했던 조직에서 떠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이젠 개미굴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빨리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 식량채집 1 부장으로서 내 할 일을 빨리 인수인계 해야 했다. 개돌이는 개미여왕에게 식량채집 1부 신입부장으로 자기 측근은 개식이를 추천했다. 나는 식량채집 1부의 수석선임팀장을 신입부장으로 승진시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식량채집부장의 인수인계를 하려면 이게 쉽다) 개돌이는 반대했다. 개미여왕은 개돌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 조직을 나가는 마당에 내가 굳이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개미여왕의 임명장을 받은 개미 한 마리가 낙하산이 되어 떨어졌다. 개미사회나 인간사회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자기 측근을 주변 좋은 자리에 배치하는 것은 상식인 듯하다.
이렇게 낙하산 인사가 늘어나면 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무능한 개미가 조직의 수장이 되면 조직원도 무능한 개미로 채워지게 된다. 무능한 개미 밑으로는 유능한 개미가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의 리더인 자신보다 뛰어난 개미를 가까이하지 않을뿐더러, 더 뛰어난 개미도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직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조직을 위해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해도 묵살되거나 리더가 그 아이디어를 가로채기도 한다.
조직 인사는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 또는 몇몇의 이익과 편향적인 의사에 따라 인사가 좌지우지되면 아첨과 뇌물이 판치는 조직으로 변질된다. 조직원들은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다. 더 많은 힘과 재산을 늘릴 수 있도록 갖은 수를 다 쓰게 된다. 그것을 초기에 뿌리 뽑지 않는다면 그 암덩어리는 점점 커져 조직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 결국 조직은 쇠퇴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 기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 조직이나 경찰, 군대 등 모든 조직에 해당된다. 조직문화가 건강해야 활력 있고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공정한 인사는 조직문화가 건강해질 수 있는 필수 요소이다. 또한 일방적인 의사결정이 아닌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고 협의하는 민주적인 문화 또한 조직이 발전하는데 필수적이다.
다음날 개돌이가 개식이를 나에게 소개해 주며, 식량채집 1 부장의 업무를 인수인계해 달라고 한다. 개식이는 개돌이의 친한 동생이다. 개식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보니 순수한 면이 많다고 느껴졌다. 개돌이는 똘똘하지만 얍삽한 면이 있었던 것과 비교가 된다. 나는 개식이에게 며칠간 식량채집 1부의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개돌이나 개식이나 이름들이 왜 그러냐? 혀가 말리면 개도라이와 개시끼라고 들릴 수 있겠네ㅋㅋㅋㅋ 개미 종족의 개씨 집안이라는 건가? 다음에는 개동이가 나오겠군......)
개식이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받아 적었다. 기억력이 좀 부족해 메모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개식이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개식이는 여기 오기 전까지 개미건설부의 공구리팀에서 팀장으로 일했고 개미집 확장 공사에서 많은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천재 메뚜기인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의 천재적인 머리로 개미 조직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는 그런 칭찬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개식이가 아첨하는 말이긴 하지만 존경 섞인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존경과 칭찬의 힘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