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그러면서 한숨을 푹 하고 쉬었어. 옆에 있는 사람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말이지. 나로서는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어. 그런 다음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말했어. 나 이달만 하고 그만둘 거야. 이 말도 처음 들을 때에는 충격이었지만 한 번씩 더 들을 때마다 충격이 옅어졌어.
자신의 이름으로 사둔 아파트는 세주고 박기사는 단칸방에 살았어.
- 혼자 살아요?
- 마누라가 애 낳다가 죽었어. 내가 스물다섯 때인가 그렇지. 그 뒤로는 혼자 살고 있어.
애 낳다가 죽은 아내가 그리워 다시는 결혼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하긴 백 킬로도 넘는 거구와 함께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박기사의 말에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박기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 부장은 인제 내 말이라면 껌뻑 죽을 거야. 부장은 인제 나한테 꽉 잡혔어.
- 그게 무슨 말이요?
박기사는 들떠 있었지만 대답은 해주지 않았어. 평소 박기사는 주방 일이 9개월째임에도 늘 부장에게 혼나는 편이었어. 물건을 닦다가 솔이나 수세미를 그대로 내팽개쳐 두어서 잔소리를 들었어. 그렇지만 달라지지 않았지. 박기사는 늘 그것을 치우지 못했고. 이제 달라질 수 없는 나이가 된 모양이었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새로운 것이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건가. 내게는 잔소리를 해대면서도 박기사 본인은 정작 못하고 있었던 셈이었어. 일하는 중간 중간에 바닥이 더러우면 물을 뿌리라고 부장이 수십 번도 더 강조했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어. 여전히 자신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약이나 물을 뿌리는 것도 그랬어. 사람이 옆에 있어도 분무기로 약을 뿌려댔어. 물도 사정없이 뿌리는 바람에 사방으로 튀었어. 그것은 그에게 날아오기도 했고 부장에게 날아가기도 했어. 그러면 부장은 짜증 섞인 소리를 질러댔지.
- 에이그, 조심성이라고는 없어.
특히 약을 뿌리다가 눈을 비롯한 얼굴에 묻기도 했는데 그때는 사태가 심각했어. 약이라는 게 말만 약일 뿐이지 사실은 살충제 이상이었거든. 원래 불판을 닦는 용도로 쓰는, 인체에 유해한 세척제였어. 그것을 오염된 곳에 뿌리고 얼마 뒤에 보면 기름때가 흐물흐물하면서 녹아내릴 정도였어.
이 말에 박기사는 한번 쳐다보고 웃을 뿐이었어.
- 제발 조심 좀 하라고.
그것에 화가 난 부장이 고함을 지르며 소리쳤어.
- 네,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 말에 수그러진 부장이 옆에 있는 내게도 주의를 주었어.
- 저건 그냥 약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야.
- 독하기는 한 것 같아요. 알루미늄 변색이 되는 거 보면 그래요.
- 그래. 한번은 같이 일하던 기사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약이 안경에 묻으니까 안경이 녹더라고. 그러니 안경이 잘 보일 리가 없어. 사장에게 안경값을 달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더라고.
약을 뿌리고 좀 기다려야 하는데도 박기사는 그걸 기다리지 못한 거야. 뿌린 후 바로 수세미로 문질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어. 다시 몇 번이나 뿌려야 했지. 부장이 잔소리를 해도 그만이었어.
- 좀 있다가 닦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참 말 안 듣는기라.
- 징그랍게 안 듣는기라.
박기사가 부장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어. 그렇다고 박기사가 듣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어. 그는 자신의 고집대로 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법이 없었지. 그런 박기사가 나에게는 자신이 말하는 방식대로 닦지 않으면 잔소리를 해댔어. 뭔가 좀 이상한 일이 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지.
- 냉장고는 위에서부터 닦는데, 먼저 약을 뿌린 후 기다렸다가 물을 뿌리고 닦아내고, 한 면씩 매조지를 해서 내려와야 돼.
매조지가 무슨 말일까? 느낌은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어. 그러나 그 방식도 그다지 좋은 방식은 아니었어. 부장이 박기사에게 가르쳐 준 방식도 아니었고. 가령 업소용 냉장고의 경우 한쪽 면을 닦고 물을 뿌리는 방식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어. 다른 면을 다 닦고 물을 뿌려도 되는 것이었는데 박기사는 그것을 고집했어. 내내 잔소리를 해댔고. 그가 닦은 냉장고 과연 깨끗하기는 할까? 늘 궁금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깨끗하기는 했어. 조금이라도 얼룩이 있으면 세탁한 신발을 몇 번이고 다시 돌리는 결벽성이 여기 적용되었다고 할까. 다만 세부적인 것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흠이 있었어. (과장은 이 흠을 항상 ‘옥의 티’라고 불렀다) 냉장고에 붙은 스티커나 고정발이나 문짝 고리쇠, 코드선은 닦지를 않아 늘 더러웠어. 아무리 어니스트나 부장의 잔소리를 들어도 소용이 없었어.
그런데 이른바, ‘옥에 티’는 금방 드러나지 않았어.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트럭에 옮겨 실었을 때에야 드러났고, 이를 눈치 빠르게 허겁지겁 손질하는 사람은 과장이었어. 어니스트가 입을 떼면 일하는 사람 모두가 기분 나빠지기 때문이었지. 그뿐이 아니었어. 박기사는 과체중으로 인해 한쪽 무릎에 관절염이 있었어. 그나마 앞으로 걸을 때는 나은데 뒷걸음질을 칠 때는 고통이 심했어. 그래서 뒷걸음질 치는 자리에는 늘 나나 과장이나 부장이 있었지.
그뿐이 아니었어. 박기사는 밧줄을 묶는 것도 요령이 없고 짐을 실을 줄도 몰랐어. 하루하루가 지옥이나 다름없었어. 옆에 있는 나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 어니스트가 박기사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 움찔하고 나도 놀랐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박기사는 어니스트의 진정한 욕받이였어. 그때마다 박기사는 우리들 앞으로 돌아와서 힘든 표정을 지었어. 그들 일가를 욕했어. 그만두고 싶다고도 그랬어.
- 그만두면 뭐할려고요?
- 뭐라도 할 게 없겠어. 혼자 몸인데. 사업을 해도 되고
내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어. 이 말이 얼마나 상투적인 말인지. 어디에선가 자주 듣던 말이 되살아나며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