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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17. 2024

무대일가 17

7  

 

  “돈을 줘야 빨리 전주 간다니까요.”  

  영수의 재촉은 불같다. 저쪽 형편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지금 모 심고 들어오는 길이여. 나도 지금 어깻죽지도 아프고 허리가 끊어질 것 겉애서 똑 죽겄다. 너는 왜 나만 보먼 돈타령이냐? 지금 놉들 오는디 밥을 빨리 해야된다.”

  전주댁이 죽는 소리를 해도 영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난 녀석을 어떻게 다룰지 모른다. 늘 이 놈 뒷바라지에 피가 마른다는 생각이 들고. 전주댁은 이내 백기를 들고 싶어졌다.   

  “어머이가 제가 사는 자취집에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어요? 간장 한 종지에 김치 한 조각으로 식사를 때우는 날 보기나 했어요?”

  “그래, 안 가 봤다. 근디 이리서 자취헐 때 찾아간께 네가 나한테 얼마나 까탈스럽게 굴었냐, 누구는 어찌 허고 있고 누구는 뭘 가지고 있는디 나는 뭐냐, 얼마나 애백이를 했냐, 그래서 그 뒤로는 네가 사는 데는 안 찾아간 거여.”

  그 때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놉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큰일났네!”

  영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전주댁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간다. 발을 동동 구르며 부엌과 샘 사이를 뛰어 다닌다. 이 집에서는 오로지 늘 나만 바쁘고 나만 힘들다. 어떻게 밥을 차려 내지? 때는 늦은 것 같다. 사람이라도 샀어야 했다. 녀석이 나를 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벌써 밥솥에 김이 올랐을 텐데. 전주댁의 귀에 놉들이 집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크게 들린다.

  “일을 늦게까지 시켰으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제, 밥도 안 주는 데가 어디에 있는 법도여?”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놉 한 사람이 마당에 선 채 동섭에게 소리친다. 동섭은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이 큰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이것이 오만해 보인다. 이쯤에서 무어라고 사과를 해야 한다. 전주댁은 마음이 더욱 바빠졌다.  

  “밥을 못 주겄으먼 삯이라도 더 주어야 되는 거 아이라?”  

  다른 놉들도 벌들처럼 윙윙거린다. 금방이라도 동섭의 멱살을 잡든지 물건이라도 내던질 기세다. 동섭은 역시 어쩌줄 몰라 하고 멍청하게 서 있다. 전주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다. 등신 같은 인간. 내게만 큰소리 칠 뿐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 그 때 뚤방 위에 서 있던 영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내뱉는다.

  “그래, 그렇게 애끼서 죽을 때 싸들고 가시오, 잉.”  

  가방을 든 영수가 놉들 사이를 헤치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놉들 앞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식에게서 이런 말을 듣다니. 수치스러움에 전주댁은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살아야 하나? 입술을 실룩여지고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다. 전주댁은 남편을 본다. 도대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다.

  이웃 간에 품앗이 하는 것이 농촌에는 상례로 되어 있고, 어느 집 대접이 시원찮고 어느 집은 융숭한, 그런 차이는 있다. 그리고 그 날 그 집 사정에 따라 일이 더 길어지기도 예사다. 다시 말해서 놉들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순전히 동섭 때문이었다. 동섭은 오후 참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모심는 사람들 뒤에서 술을 한잔씩 따라 주기도 하고 이리저리 다니며 모를 날라주기도 했다. 그런데 참을 먹고 난 직후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었던 동섭은 염치고 체면이고, 논두렁을 베고 누워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코까지 골았다. 그 때 전주댁은 재빨리 동섭에게 달려가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동섭은 아무리 흔들어도 음, 음 하는 잠꼬대 소리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전주댁은 못줄 앞으로 가서 놉들의 화를 돋구지 않기 위해 이렇게 외쳤다.

  “누가 저 양반 좀 밀어서 꼬랑으로 빠자 버려요!”  

  전주댁의 말에 놉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놔 두시오, 팔자 편한 양반 잠 깨우지 말고.”   

  그런데 해가 지고도 일이 끝나지 않자, 놉들의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쉬었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해졌다. 자꾸 놉들의 눈이 논두렁에 누운 동섭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전주댁은 억지로 남편을 깨워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저녁을 짓기 위해 놉들만 남겨두고 집으로 온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놉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저녁을 준비했더라면 별다른 소란 없이 하루를 넘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전 일에 충격을 받은 놉들은 조금 냉정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씨네가 이런 꼴을 당한 것이 아주 고소하다고 여기기도, 자식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동정해 마지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놉들의 흥분된 상태를 싹 가시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때는 이 때다, 전주댁은 놉들에게 사과하며 이번만 봐달라고 여자다운 미소로 애원한다. 남자들의 눈빛에 순진함과 착한 것이 전주댁 눈에 느껴진다. 놉들은 못이기는 척하고 발길을 돌린다. 전주댁은 그들의 뒤에 대고 외친다.

  “너무 섭섭허게 생각들 마시오, 나중에 따로 대접을 걸게 할 텐께.”

  기분이 풀어진 놉은 손을 들기도 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놉은 알았어요, 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며 사라져간다. 그들을 집 어귀까지 바래다주고 전주댁은 돌아온다.  

  “사람이 대체 왜 그래? ”

  도대체 빈둥거리는 인간은 전주댁을 참을 수 없게 한다.  

  “왜 그러기는 왜 그래. 심들고 피곤헌게 그러제.”

  동섭은 되레 큰 소리다. 다른 사람에겐 찍 소리도 못하는 인간이 집안에서는 늘 큰 소리다. 전주댁은 기분이 울컥해지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아마 내 인생은 이렇게 마감할 것이다. 내가 바랐던 남자는 좀 더 능력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만났더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아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 봐야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늘상 이렇다.  

  “농판이 겉은 남자를 데리고 살라니, 참.”   

  더 이상 말해보아야 전주댁은 속만 터질 뿐이었다. 얼마 후 전주댁은 안방에 잠들어 있던 경수를 깨워 늦은 밥상 앞에 앉는다.

  “창수는 어디갔냐?”  

  경수는 아직도 게슴츠레한 눈을 뜬 채 수저를 든다. 경수는 형제들 중 가장 논리적이고 전주댁을 닮아 독립심이 강하다. 하지만 전주댁은 늘 대하기가 껄끄럽다. 언제 제 주장이 옳다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까 그 놈 따라가는 것 겉앴어.”  

  동섭이 대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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