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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새우타령

by 최연수

골목길 들머리 초가집.

봄볕 일렁이는 개나리 울타리 앞에서

풍차바지에 기저귀 차고 아장아장

삽살개한테서 걸음마를 배웠지.


오동잎 너울거리는

슬레이트 집 뜰 차일 아래서,

족두리처럼 고운 아가씨와

백년가약을 맺었지.


홍시 주렁주렁 열린

기와집으로 이사 가서,

까치들 풍악 소리 들으며

환갑 잔치를 베풀었지.


골목길 끝자락 벽돌집.

눈 모자를 쓴 소나무에 기대어,

나도 흰 모자를 쓴 채 뒤돌아보니

발자국을 묻어버린 보도-블럭과 눈.


내 눈에 안개가 끼었나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골목길 들머리 초가집.

이내 사라질 소실점 되었네.


* 2019.10.12. ‘세대 통합 방배문학제 차상’




내 安胎(안태)고향은 농촌이다. 이 골목 저 골목 개나리 울타리로 둘린 초가집이 많았다. 삽살개를 키운 집도 있었다. 나는 이 골목에서 풍차바지를 입고 기저귀를 찬 채 아장 아장 걸음마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작은 浦口(포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船艙(선창)가 뒷 골목은 우리의 낙원이었다. 누나와 함께 주워 온 갖가지 조가비로 살림을 차렸다. 울타리 밑에서 뜯어온 풀잎으로 음식을 빚고, 띠와 수수깡으로 만든 書房(서방) 각시 혼례도 올려주었다. 鄕愁病(향수병)처럼 회갑이 지나 불현듯 백발을 흩날리며 이곳을 찾아갔으나, 옛 추억만 아스라이 남고 내 발자국은 흔적도 없었다.

소년 시절을 보낸 小邑(소읍). 너덧 차례나 이사를 다녔다. 2차대전 막바지, 골목길은 우리의 솔방울 전쟁놀이터가 되었다가, 防空(방공) 경보가 울리면 눈

귀 가린 채 엎드러진 防空壕(방공호)로 변했다. 한편 해방과 정부 수립의 激變期(격변기), 左右翼(좌우익) 싸움의 불똥은 우리 집에 떨어져, 共匪(공비)들의 放火(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 때 우리 골목길은 市街戰(시가전)이 벌어진 전쟁터였다. 역시 회갑이 지나 이곳을 갈 일이 있었으나, 아예 고개를 돌렸다.

부모 膝下(슬하)를 떠나 도시에서 遊學(유학)했다. 6.25 전쟁 後遺症(후유증)으로 나는 苦學(고학)과 自炊(자취)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의 居處(거처)는 貧民窟(빈민굴) 같은 변두리였다. 허기진 몰골로 오갔던 이 골목길에서 옷소매는 종종 눈물로 얼룩졌다. 向學熱(향학열)로 蒸發(증발) 되지 않았으면 늘 젖어있었을 것이다. 望八(망팔)에 잠깐 들렀으나, 개발이 되어 역시 아무 흔적이 없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초창기 교직 생활도 빛 좋은 개살구였다. 고향 집이 두 번째 燒失(소실)된 바람에 온 가족이 빈 손으로 上京(상경)했다. 게다가 공부한답시고 辭職(사직)을 해, 가난은 거머리처럼 우리 피를 빨고 있었다. 서울에서 여남은 집을 전전했는데, 이 때의 골목길도 한결같이 악다구니 터였다.

반생을 이런 골목길에서 살다가, 결혼하고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파트

로 이사 왔다. 그러므로 후반생은 골목길 없는 삶이다. 나의 삶이 곧 우리 역사의 縮小版(축소판)이다. 만약 시로 표현한다면 만리장성 같은 어두운 敍事詩(서사시)가 되리라. 그래서 이 詩(시)는 나의 추억을 類推(유추)해서 어느 八旬(팔순) 노인의 인생 路程(노정)을, 어둔 그늘은 거둔 채 그의 고향 마을 골목길로 比喩(비유)해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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