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타령
홀로 있고 싶다.
누군가 함께 있으면
두터운 옷 겹쳐 입는 것 같다.
홀로 걷고 싶다,
여럿이 함께 걸으면
무거운 짐 진 것 같다.
여럿이 있고 싶다.
웃음을 주고받고
오순도순 얘기도 나누고.
여럿이 걷고 싶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홀로 있으면 얼어 죽고
함께 있으면 찔려 아프고.
고슴도치가 나 아닌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여럿 있어도 아프지 않는
최슴도치가 되어야지.
소년 시절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세월이었다. 해방 후 6.25전쟁까지 갈라진 思想(사상) 싸움판에서, 사람이 무서워 對人忌避症(대인기피증)이 생겼다. 收復(수복)이 되어 사회가 안정되면서 마음도 진정되었다. 그러나 학창시절 오랜 세월 혼자 自炊(자취) 생활을 했다. 가끔 고향 생각, 가족들이 그리우면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살림하랴 학교 다니며 공부하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 언제 孤獨(고독)을 실감할 수 없었다. 학교에 가면 나를 신뢰해준 은사님과, 나를 좋아하는 몇몇 학우들이 있어서 큰 疎外感(소외감)은 없었다. 그러나 주먹 쓰고 거들먹거리며 잘난 채 으스대는 학우, 추근대고 이기죽거리는 학우들이 싫어 교우관계가 넓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 새 환경에 적응하고자 노력은 하였지만, 내 돈 떼어먹고 利得(이득)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사람, 까닭 없이 경쟁상대로 넘어뜨리려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不條理(부조리)로 썰렁한 사회에 쉽게 정들 수 없었다. 게다가 계속된 가정의 역경과 공부(고시)에 專念(전념)하고보니, 대인관계를 넓힐 수 없었다. 예수를 믿으면서 垂直的(수직적)인 對神關係(대신관계)와 水平的(수평적)인 對人關係(대인관계를)를 정상화 하기 위해, 특히 많은 사람들과 교제해야 하였다. 나에게는 코페르닉스적 轉回(전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 반생은 전 반생의 연장이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홀로’에 이골나있다. 혼자 있어도 고독을 크게 느낀다거나 홀로 걷는다고 疎外感(소외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와 함께 있으면 두터운 옷을 여러 겹 껴입는 느낌이고, 여럿이 함께 걸으면 무거운 짐을 지는 느낌일 때가 많다. 오히려 홀로 있다는 것은 아무 걸거침 없이 홀가분하다. 반면 누구와 함께 있으면 웃음이 있고 얘깃거리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고, 여럿이 함께 걸으면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 든든하다.
동화 ‘고슴도치의 소원’에서 말했듯, 이래서 홀로 있으면 추워서 얼어 죽고, 가까이 다가가면 찔려서 아픈 고슴도치의 딜렘마가 나의 딜렘마이다. 특히 요즘 들끓고 불타는 군중들 틈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데이비드 리스먼(Davit Riesman)이 말한 바 群衆(군중) 속의 고독일 것이다. 외롭지만 혼자이고 싶고,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홀로 있어도 춥지 않으며, 여럿이 있어도 아프지 않는 고슴도치의 突然變異(돌연변이) 곧 別種(별종) 최슴도치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