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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Jan 28. 2025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내렸다. 신원중학교 교정 뒷문 밖으로 나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녹음 속으로 들어가니 마치 한 여름에 강물로 뛰어 들어가는 듯 시원했다. 목재 데크길로 올라가니 쉼터. 잠시 숨을 돌리면서 건너편 대학생들에게서 볼펜을 빌렸다. 어쩌다가 필수품인 펜을 잃었기 때문. 나더러 문인이 아니냐고. 그들은 이 근처 서울예대 건축과생인데, 조경에 관한 과제를 하기 위해 올라왔노라고. 잠깐이나마 길벗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 자두나무가 오얏나무요, ‘李’가 ‘오얏이’자라는 말을 나로부터 처음 듣는다고. 

 안산방죽.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고즈넉한 연못인데, 물가의 노오란 창포와 보라 창포가 시원한 차를 들고 마중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이 꽃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그 학생들은, 말로만 듣던 이 꽃이 창포라는 것도 처음 알았노라는 것. 하기야 요즘 젊은이들이 알 리가 없지. 바로 코 앞에 인왕산이 버티고 서있다. 이 안산과 인왕산 자락 사이에 뚫린 이 고개가 곧 무악재요, 고갯길이 가파르고 길목이 좁아, 옛날엔 도적과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여나무 사람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아재’라 하던 것이, ‘무악현’으로 다시 ‘무악재’가 되었노라고.

 조금 더 올라가니 어린이집 아이들의 ‘자연물로 만들기’ 학습을 하고 있었다. 자연물을 본떴을 뿐 재료는 모두 인공물이다.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과 박노해의 시 ‘너의 하늘을 보라’가 세워져 있어, 군것질감을 안 가져왔는데 맛있는 샛밥을 먹은 셈. 봄철에는 개나리꽃으로 산이 온통 노란 물감을 칠한 듯 한다는데, 지금은 아까시아 터널 길섶으로 개나리를 대신한 노오란 애기똥풀 꽃이 아기똥거리며 걷고 있다. 

 봉화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그 옆 외딴 곳의 너와집을 둘러보았다. 사진과 모형물로만 보았던 실물을 처음 보았다. 삼척시 도계읍에 민속자료 제33호로 몇 채 남아있을 뿐, 깊은 산간지대에서도 거의 사라졌다는데, 나무토막들을 잇대고 맞추어 지붕을 이고 벽을 세운 집이다. 그야말로 옛날 화전민이 살았던 판잣집인 셈인데, 비가 오면 빗물이 새고 ‘구름꽃운지’ 버섯이라도 더덕더덕 돋아날 것만 같다. 그래도 환기와 배연이 잘 되고 단열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어떤 분이 사는지 주인은 보이지 않고, 텃밭의 채소들만 관상용이니까 손대지 말라는 푯말과 함께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산책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아 쓸쓸해보이지는 않으나, 어쩌다가 이곳에 와서 이런 집을 짓고 살까?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불려다니다가, 이렇게 아무 데나 떨어지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지.

 노약자들을 위해 나무 데크 길이 잘 닦아있기도 하고, 이곳저곳 쉼터와 운동 시설들이 마련되어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꼭대기로 오를수록 백악 큰 바위 사이사이로 가파른 오솔길이 나있다. 드디어 정상. 296m라니까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닌데, 돌산에 뙤약볕이라 힘들었다. 드디어 봉수대터. ’94년에 복원된 봉수대가 서있다. 평남 강계와 의주를 각각 시발점으로 한 제3, 제4봉수로의 길목에 자리잡은 것인데, 여기 한 곳만 복원되었다고. 이곳 조망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전경은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멀리 북한산의 쪽두리봉에서부터 보현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답다. 삼각산에서 뻗어나와 인왕산을 거쳐, 무악재를 넘어 이어진 이 무악산은 동봉과 서봉이 길마 같다고 해서 안산(鞍山)이라 한다지. 

 정상에서 서있으니 역성혁명으로 집권한 조선 태조의 한양 천도가 생각난다. 풍수지리의 대가 권중화의 건의에 따라, 무학대사와 동행하여 살펴본 계룡산 자락에 천도하기로 공사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하륜의 반대로 공사를 중단하고,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한양으로 변경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신하들과 이 곳에 올라 산세를 살피고 산 아래에서 유숙하면서, 무학도 참석한 대토론회를 열었다. 마침내 인왕 주산론자인 무학과 백악 진산론자인 정도전의 기 싸움에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팔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이후 600여년 간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충청도로의 천도론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으로 정국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마치 계룡산이냐 북악산이냐는 천도론을 둘러싼 옛날의 논쟁이 재연한듯 했다. 헌법재판소의 천도 불가 판결에 따라, 편법으로 행정수도로 낙착이 되어 마침내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2012.7.1).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난산이 된 이 행정도시가, 과연 기형아인지 정상적인 우량아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성계와 그의 왕사인 무학대사와의 대화를 생각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이성계 “친구, 당신은 왜 돼지처럼 생겼는가?”

 무 학 “당신은 꼭 부처님 같이 생겼습니다.”

 이성계 “난 당신을 돼지 같다고 했거늘, 당신은 날 부처님 같다 하는가?”

 무 학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엔 부처님으로 보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은, 같은 물이라도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비단 인물과 풍수만이랴.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서대문형무소를 발아래 내려다보며 돌아오는 길은, 아주 가파르고 굵은 모랫길이 이어져, 미끌어질새라 밧줄을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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