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설상가상이 아닌 염상가한(炎上加旱)이랄까, 100여 년만의 6월중 혹서에 100여 년만의 한발이라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 우환이 있어 즐기던 산행을 달포나 못 했지. 그런데 며칠 동안이나마 단비가 내린후, 모처럼 갠 창공과 생기 넘치는 녹음이, 소낙비 되어 내 마음의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새장 문이 열린 새처럼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와, 지하철 5호선 온수역에서 하차. 찜통 더위는 고개 숙일 시간이었지만,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 지열이 아직 식지 않았다. 밀짚모자 챙에 꽂히는 햇살도 아직은 휘어지지 않고.
산길인지 동네 골목길인지 아직 분간할 수 없는 들머리. 눈에 익은 잡초들만 무성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어선 게 아닌지 고개를 갸웃했다. 호젓한 오솔길을 한참 걷다보니 도란도란 인기척이 있어 어찌나 반가운지. 땀받이 수건을 머리에 두른 걸로 보아 산책하는 일행임이 틀림없었다. 하기야 길이 따로 있으랴, 다니면 길이 나지. 그래도 그렇지 이름난 둘레길이라는데 이렇게도 인적이 없단 말인가? 어렸을 적에 오르내리던 시골 앞․뒷동산 숲길 그대로다.
해발 74.3m라는 이정표 앞에서 비로소 두 사람을 만났다. 동부골든 아파트까지 4.4Km라는데, 그게 마치 목적지같이 계속 표시되어 있다. 해발 80m 지점에서 다시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하두 사람이 그리워 오가는 사람들을 正자를 써가며 헤아려보기로 하였다. 문득 이수복의 ‘봄비’, 용혜원의 ‘봄이야’, 이혜인의 ‘엄마’와 김용태의 ‘작년에 피었던 꽃’ 시화판이 연이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비록 철 지난 시들이지만 시감․시정에 무슨 계절이 있으랴.
촉촉하게 비에 젖은 구불구불 흙길이 정겨워서겠지, 맨발로 걷는 사람도 더러 있군. 해발 85m 지점인데 왼쪽으로는 나지막한 와룡산이 보이고, ‘온수 도시 자연공원’이라는 푯말이 서있다. 그러나 공원이라기 보다는 올레길 아니 둘레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본래 올레는 큰 길에서 집까지 이르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도의 말인데, 바다는커녕 계곡 물도 없는 숲 길이라 둘레길이 더 알맞은 말일 것 같다. 아름드리 나무는 아니나, 아카시아․팥배나무․굴참나무․리기다소나무 군락지가 이어진 아늑한 숲길이다. 야생화 생태원이라는데 이름표만 서있을 뿐, 오랜 가뭄 때문인지 꽃은커녕 흔한 쑥부쟁이 이파리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정자 하나가 있었으나, 그늘 밑에 나무 의자와 운동시설 고작 몇 개가 놓여있는 조촐한 쉼터이다. 그런데 유별나게 쉼터에는 도서보관함이 새장처럼 서 있다. 100여 권의 책들이 꽂혀있어 모처럼 공원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용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눈에 띄었을 뿐이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한가롭게 독서를 할 수 있으랴. 기증 받은 헌 책들일 텐데, 시집이나 유모어집․만화 아니면 월간 잡지 등속이었으면... 은은한 노래를 흘려 보내는 음향시설이 재정적으로 어렵다면 아동화라도 대신 걸려있으면 눈요기라도 할 걸.
정상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산책객들이 제법 늘었다. 해발 114m에 지나지 않은 나지막한 산이요 비탈도 느릿한 숲길이라, 남녀노유 많은 사람이 붐빌 것 같은데 한산한 편이다. 바위도 계곡 물도 없이 너무 밋밋해서일까? 지나친 꾸밈과 거짓으로 튀는 것이 판치는 세상이기에, 오히려 옛날 시골 초가지붕 위의 박꽃같은 소박함도 돋보이는 법. 너나없이 평범한 산책객들이기에,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싱그러운 숲 냄새와, 지오스민을 뿜어내는 구수한 흙 냄새를 맡으며 걷는, 평범한 이 숲길이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오히려 값질 수 있는데....
부천시로 통하는 작동터널 위를 지나니 드디어 국기봉. 그다지 높지 않은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여느때보다 산뜻하게 보인다. 아마도 구로구와 양천구의 경계인 지양산 정상이 국기봉인 모양. 안내판에는 수렁고개 이야기만 씌어있다. 이곳이 부천시 까치올 지골과 온수동 사이의 고개인데, 땅이 매우 질어서 수렁고개라고 했다는 것. 그리고 지골이란 냇물이 많아 질은 골짜기라는 어원에서 나왔다고. 김소월의 ‘산유화’, 김춘수의 ‘꽃’과 ‘꽃을 위한 서시’ 조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꽃이 소재인데, 꽃철이 훨씬 지나서 꽃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나보다 했더니 다시 오르막길. 200여개의 계단을 통해 매봉산에 올랐다. 빗물에 씻기어 모래와 돌들이 드러난데다가, 경사가 급해서 밧줄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올랐다. 김용택의 시 ‘먼 산’을 읽고나서, 우수조망명소에서 멀리 남산․용마산․아차산....능선들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보았다. 윤동주의 시‘새로운 길’과 권규학의 시 ‘나무와 새’를 읽었다. ‘...네가 있어 살아가는 나/ 나로 말미암아 행복해지는 너/ 너는 나무 나는 한 마리 아름다운 새.’ 하지만 한 마리 새의 지저귐도 듣지 못했다. 고기 없는 냇물, 새 없는 숲, 노래 없는 인생...오늘따라 콧노래도 잊은 채 2시간 남짓 걸었다. 마침내 강소천의 동시 ‘그리운 언덕’이 나타나,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적적해서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불렀더니 속이 후련했다. ‘〜들풀처럼 살라/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는 류시화 시 ‘들풀’ 과 양현주의 시 ‘나무’를 끝으로 산을 내려왔다. 들머리로 되돌아온 게 아니고 끄트머리 길이다. 이렇게 산림욕하면서 시 낭송을 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