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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울 꿈의 숲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저도 따라 갈까요?”

“웬 일이야?”

아내가 함께 따라 나섰다. 허리 디스크로 몸이 불편한데다가, 먼 길을 걷는 걸 달가와 하지 않은데 뜻밖이다. 머리가 허연 노부부들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부럽다는 얘기를 이따금 귀담아 들었기에, 그저 따라가주는 것이겠지.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에서 마을버스로 환승, 번동 북서울 꿈의 숲 앞에서 내렸다. 그동안 집안의 우환과, 때 아닌 긴 장마와 오랜 폭염, 그리고 세찬 태풍 등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던 산책이다.

이전에 학교에서 소풍을 왔던 드림렌드. 15,6년 만에 다시 찾아왔는데 몰라보게 달라졌다. 2009년에 새로 개장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닌게아니라 아기자기하게 잘 단장해놓았다. 때마침 월요일이라 한산한 편인데, 주말이나 휴일에는 꽤 북새통일 것이라 추측했다. 입구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호 받는 보호수가 아니라, 오히려 공원을 보호하는 수문장 같았다. 방문자센터에서 안내도를 챙겨, 바로 앞에 펼쳐진 칠폭지 앞에 섰다. 지형의 등고차를 이용 형성된 계류를 따라 내려오는 물을, 7 개의 크고 작은 폭포 경관을 연출했다. 소담한 낙수와 예쁜 수생식물을 구경하노라니, 여름내 몸에 밴 기름땀이 깨끗이 씻기고, 찌든 때가 말끔히 벗겨진 것 같았다.

창녕위궁 재사(齋舍-등록문화재 제40호). 조선 23대 순조의 복온공주와 부마 김병주가 살았던 전통 고택. 옛 화려함은 바랬으나 고즈넉함과 소탈함이 오히려 친근감 있었다. 국권을 빼앗긴 경술(庚戌) 국치를 분통해 하며, 이곳에서 자결했다는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의 넋이 지금도 편히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독도와 성노예 문제로 인해서 지금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 서있는 아름드리 상수리 나무는 큰 덩치로 보아 보호수로 지정될 법도 한데, 옛날 공주와 함께 살지는 않았으리라. 뒤뜰의 대숲 길은 병풍이 되어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야기 길이라니 살랑거리는 바람에 일렁거리면 댓잎끼리도 오순도순 이야기 판이 벌어지리라.

조금 올라가니 잔잔한 월영지. 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제법 큰 연못이다. 중도, 방지원도형(方地圓島型)의 연지(蓮池)에는 수련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매화를 바라볼 수 있는 매대. 시원스레 쏟아지는 월광폭포(7m)와 솟구치는 분수를 바라보노라니, 40여 년만의 혹서로 인하여 폭발한 발진들이 겁을 먹고 슬슬 사라질 것 같다. 아내는 애원정에서 누운 채로 쉬었다. 아무 데나 휘갈긴 낙서들만 아니라면 참 좋은 쉼터인데...잘 닦아진 화강암 석교를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았다, 물속에서 자라는 낙우송 군락지 사이 사이로 오리들이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졸졸졸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니 청운답원(靑雲畓園). 잘 손질된 잔디광장은 서울 광장의 2배나 된다고. 그 옆으로는 어린이 물놀이장이다. 한 여름 아이들 머리 위에 물 폭탄을 쏟아 부었을 커다란 물통이, 시치미 때고 큰 눈을 부릅뜬 채 지금은 자고 있구나. 상상톡톡미술관은 휴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창포원을 가로 지른 나무데크 길을 따라 걷다가 라 포레스타 카페테리아 앞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왔다. 그늘진 전망데크에서 아내는 다시 허리를 쉬기로.

나 혼자 다시 문화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널따랗게 깔린 돌 광장 점핑분수에서 꼬마 어린이들이 분수와 함께 신나게 놀고 있다. 그 옆 어린이놀이터에서도 큐빅식 정글짐 미로와 여러 놀이 기구를 즐기고 있다. 적막했던 공원이 활기를 찾은 듯. 역시 공원은 어린이 동산이요 노인들의 나라라야 하는데... 아이들은 그런대로 많았으나, 정장을 한 채 지팡이에 의지한 할아버지 한 분만 쓸쓸히 걷고 있다. 구부정한 그 허리와 센 머리에는 지난 세월의 애환이 짙게 묻어 있다. 화려한 남방 셔츠를 입고 꼿꼿한 허리로 걷고 있는 나는 청년인 셈. 그러나 그 깡마른 모습 속에서 내일의 자화상을 그려보았다. 방콕대학(방 안에 콕 박혀있는)이나 동경대학(동네 경노당)에 다니는 어르신들보다 얼마나 귀태가 나는가?

문화광장에는 오픈스튜디오, 드림겔러리, 북 카페, 퍼포먼스홀, 콘서트홀 등이 즐비했으나 모두 휴관이라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우뚝 선 전망대(49.7m)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휴일 때 오느냐는 표정으로. 경사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는데 물론 가동 중단. 북한산․도봉산․수락산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특히 서울의 야경은 일품이라는데.... 전망데크로 내려와 아내와 요기를 하다. 둘이서 먹으니 한결 맛있구나. 등 뒤로는 숲길이 뚫려있다. 그윽한 숲 향기와 검푸른 나무들이 마음 여린 내 옷자락을 붙잡고 끌지만, 어찌 나 혼자 걸을 수 있으랴. 야트막한 벽오산(135m)과 오패산(123m) 능선이 공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이 산이 곧 북서울 ‘꿈의 숲’ 이겠지. 조형물 희망의 숲을 지나면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꿈을 아련히 꿈꾸며 걷거나,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마음의 쓰레기를 묵상으로 깨끗이 치우며 걷고 싶은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는데, 모처럼 아내와 동행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보니 새삼스럽게 넓구나. 66만여㎡로서 서울에서 네 번 째 큰 규모란다. 아주 평탄하고 아늑한 공원이라 노약자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쉼터이다. 봄의 벚꽃 길과 가을의 단풍 길이 빼어나다니 또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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