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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아내 팔순기념집

by 최연수

古終命(고종명)! 늙도록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은, 우리네 소원으로서 5복 중 하나로 꼽힌다. 젊은 시절에는 입에도 담기 싫은 말이었으나 이따금 되씹어보는 것은 늙었다는 것. 봄철 꽃보다 가을철 단풍이 더 곱고, 저녁 노을이 아침 노을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을 되새김하는 것 또한 늙은이들의 넋두리일 것이다. 찬 서리를 맞아 오글쪼글하게 바짝 마른 채, 가지 끝에 달랑 메달려 바둥거리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보다는, 불꽃처럼 활활 타다가 뚝 떨어지는 단풍잎을 부러워 했다. 그래서 가을철을 맞이하면 으레 내장산 단풍을 떠올리곤 하였지.

벼르고 벼르던 내장산을 가기로 하였다. 아내의 팔순 때는 꼭 해외 여행을 시키고자 했기에, 우람한 중국 장가계의 상상화를 머릿속에 그려두었다. 그러나 너무 높고 멀어 그만 지우고 말았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 하지 않던가? 그래서 가끔 떠올린 내장산을 가기로. 양의 창자처럼 구불거리는 골짜기라 해서 內臟山(내장산)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內藏山(내장산)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해외 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썩 달가워 하지 않은 아내는 여기조차 시큰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그림이라도 그리자고 붓을 들었다. 여러 사진을 견준 끝에 눈동자가 머문 곳이, 羽化亭(우화정) 주위였다.

11 가지의 단풍나무가 서로 다투며 자라고 있다는 내장산의 단풍은, 다른 단풍나무보다 훨신 곱다고 한다. 마치 산에 들어간 듯 붓을 놀리면서 내 마음 속도 붉게 염색을 하였다. 이렇게 화려한 水墨(수묵) 彩色畵(채색화)는 처음이다. 가장 강조한 대목은 떨어지는 단풍잎.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일랑 두지말고 타다가 불현듯 뚝 뚝 떨어지는 두 잎을 그렸다. 물론 우리 내외다. 이렇게 똑같이 떨어지면 오죽 좋으랴.


그림으로나마 내장산 단풍 구경을 하였노라며 벽에 걸어놓았는데, 이게 현실이 되었다. 아내․딸내미와 함께 팔순 10여일을 앞두고 내장산 여행을 떠난 것이다. 아내는 선심쓰듯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했으나, 막상 단풍 구경에 취한 듯, 武陵桃源(무릉도원)이나 온 듯 즐거워했다. 문득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오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린애마냥 단풍잎을 주워들고 신혼여행 아닌 구혼여행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림에서 처럼 뚝 뚝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우리도 저렇게...’ 하고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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