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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지크] 시리즈
제1부 철혈의 지배
1944년의 장
1944년 프롤로그. 갈색의 베를린
44년 1월 10일 오전.
혼탁한 구름이 낮게 깔린 태양을 막는 베를린, 총통관저.
"이건 군수부 장관으로서 반드시 각하께 보고해야 할 내용입니다.
43년의 성과뿐 아니라, 올해 우리가 부딪힐 한계까지도 정리했습니다."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항의하듯 말했다.
"총통께 불필요한 우려를 안겨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갈색 제복의 남자, 나치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은
서류 위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특히 이런 부정적인 수치는… 당신도 알잖습니까.
기분을 해치는 보고서를 그분이 어떻게 다루는지. "
"불편하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분이 있는 그대로를 아셔야…
총통께서 군수부에서 보고서를 작성,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
보어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류를 들춰보았다.
"그럼 저희가 약간의 합의를 볼 필요가 있겠지요.
어디 보자... 여기 있는 몇 문단은 삭제하세요.
연합군 폭격, 노동력 고갈, 동맹국 불확실성…
이건 전혀 건설적이지 않아요. "
한 시간 후, 슈페어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채 총통관저를 나섰다.
그가 히틀러에게 문서를 설명할 때에도 보어만은 옆에 서서
수치들을 '수정'하고 '오류'를 바로잡아주었다.
수정된 숫자는 현실과 조금씩 멀어져 있었고,
슈페어는 그것을 알면서도 고칠 수 없었다.
그가 총통관저의 홀에 멍하니 서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친애하는 젊은 장관님! 이렇게 만나다니 우연이로군요!
헌데, 표정이 좋지 않은데요?"
검은 양복을 입은 체구가 작은 남자가 다가왔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국민계몽선전장관.
슈페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냥… 보고서를 전한 뒤 돌아가는 길입니다. "
"보고서라… 혹시 또 갈색 제복의 문지기께서 가로막으셨나?"
괴벨스의 눈가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엔 날이 서 있었다.
슈페어는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당신이라면 제 기분을 충분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우린 지금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요제프.
그런데, 보고서 한 장이 지도자에게 닿는 데조차…
보어만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말이 됩니까? "
괴벨스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었다.
슈페어는 말을 이었다.
"서방 연합군 폭격, 노동력 고갈, 동맹국의 불확실성… 이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걸 '삭제'라는 한 마디로 지웁니다.
그 결과를 짊어지는 건 결국 우리인데. "
괴벨스는 갑자기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슈페어가 순간 말을 멈췄다.
"아, 그렇군요!"
괴벨스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마침 선전부도 군수부와 협조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선전부로 함께 가시죠! "
슈페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어… 네. "
괴벨스는 홀 안의 경비병과 비서들을 스치듯 걸음을 옮겼다.
슈페어는 어리둥절한 채 그 뒤를 따랐다.
얼마 뒤, 오후. 괴벨스의 차 안.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괴벨스가 창밖을 흘끗 보며 말했다.
"하여간 당신이란 사람은… 총통관저가 보어만의 소굴이라는 것도 잊었소?
방금까지 시달려놓고? 왜 그리 순진하시오…"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한테서 살아 나오려면
보고서보다 먼저 사람을 읽어야 한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군."
슈페어는 대꾸 대신, 창 밖으로 흘러가는 회색 거리를 바라봤다.
"아시겠지만 저는 정치인이 아니—“
"그만, 그만. 그만하시오."
괴벨스가 손바닥을 들어 말을 잘랐다.
"당신은 한 국가의 장관이오. 건축가이던 시절은 애초에 끝났소.
아니, ‘총통의 건축가’였을 때부터 이미 정치적 자본을 쌓고 있었단 말이오.
인정할 건 인정하시오.
보어만이 싫다, 누가 내 서류를 검열한다—이건 모두 정치요."
슈페어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말은 나오지 않고, 나오려던 말은 한숨이 되어 차창에 번졌다.
그 한숨이 서린 창밖 풍경은, 어느새 더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싸라기눈이 회색 거리를 부드럽게 덮기 시작했다.
얼마 뒤, 선전부 장관실.
괴벨스가 의자를 가볍게 끌어내며 손짓했지만, 슈페어는 서 있었다.
"예, 그게 다 정치라고 칩시다.
그럼…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온 것도 정치입니까?”
괴벨스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요, 장관님! 그리고…"
그는 슈페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에서 장관실까지 오는 동안 당신이 침묵한 것도 정치지요! "
그가 다시 의자를 당겨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슈페어가 결국 앉았다.
그 순간 괴벨스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그래서, 당신은… 갈색의 문지기가 마음에 안 드나 보군요?"
괴벨스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슈페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잘못 온 게 아닐까? 나는 이미 거미줄에 걸린 게 아닐까?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고, 시선이 커피잔에 머물렀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괴벨스는 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문지기 없이 일하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은 있습니까?
그의 존재가 무슨 가치일지, 없어질 때 얻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지요."
슈페어는 어깨를 조금 움찔했다.
"아, 아뇨… 존재니 가치니, 없어진다니요. 무섭습니다."
괴벨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지금도 괜찮지 않습니까?
하지만 총통 관저에서의 당신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요."
잠시 침묵.
커피잔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올라왔다.
괴벨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싫습니까?"
"아, 아닙니다. 싫다니요… 그냥 이런 이야기에는 약해서."
슈페어가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괴벨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 전 커피 얘기한 건데요.
진짜 원두입니다. 대체품이 아니라…
전시엔 흔치 않지요."
완전히 읽히고 있군.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슈페어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향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결심이 굳어졌다.
"예, 싫습니다. 커피 말고, 보어만이 싫습니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라머스(정부 행정총괄자)도 마찬가지고요.
제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정보를 통제하며,
관구장들을 앞잡이처럼 내세웁니다. "
괴벨스는 대답 대신 잔을 천천히 돌렸다.
미소가 눈가까지 번지더니, 두 손바닥이 가볍게 부딪혔다.
"좋아요, 좋습니다! 감정의 발산이 훌륭해요!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 정도 말하는 건 죄도 아닙니다!"
그는 웃으며, 마치 무대 위 배우를 칭찬하듯 박수를 쳤다.
슈페어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소리 없이 받침 위에 안착하는 동안, 그는 미묘하게 웃었다.
"그래서, 뭡니까?
전 이제 ‘반동적 발언’으로 체포됩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과 저는… 정치적 동지라는 거지요!"
괴벨스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장관님은 총통을 입맛대로 다루려는 저 자들과 맞서 싸우고 싶으시겠죠?
이대로 조롱당하고, 조종당하기는 싫으시겠지요?!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총통을 위해—저들과 싸워야겠지요?!"
숨을 고를 틈조차 없이 쏟아지는 말.
슈페어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격렬한 어조 속에서 자신이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한 말을, 괴벨스가 정교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나는 내 영달이나 권력을 위해 그들과 싸우려는 게 아니다.
그저… 독일을 위해서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이 그의 안에서 처음으로 진짜처럼 울렸다.
"전 뭘 하면 됩니까?
제가 할 만한 일은 뭐죠? 장관님, 생각이 있으신가요?"
슈페어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한 눈빛을 보였다.
"진정, 진정하시오… 이제 차분하게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괴벨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 그가 진심으로 지은 첫 미소였다.
그것은 오래 기다린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손에 넣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늦은 밤. 그들의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슈페어는 알 수 없는 묘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마치 오래된 밀실의 문이 방금 열린 것처럼.
그러나 그 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선이나 외교 이야기가 전부처럼 보였지만,
베를린 안에서는 또 다른 정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통관저와 제국수상부의 회랑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총탄이 아닌 접견권·정보·명령 해석권을 놓고 벌어진 권력투쟁이었다.
43년은 군사 지도부의 발언권이 급격히 약화된 시기였다.
전쟁 초기에는 전선의 장군들이 작전과 전략을 주도했지만,
차디찬 41년의 겨울, 모스크바 전투의 패전 이후 베를린 정치권력은
전시의 합리성보다 체제 유지를 우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힘을 얻은 인물은 마르틴 보어만이었다.
그는 총통 비서실장으로서 히틀러와의 모든 접촉을 관리하며,
외부 인물들이 히틀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을 통제했다.
이른바 ‘갈색의 남자, 총통의 문지기’였다.
또한 그는 나치당 조직의 최고 운영자로서
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한스 라머스는 무임소장관이자 제국수상부 비서실장으로서
정부 행정과 내각 운영을 총괄했다.
모든 법령과 명령은 그의 책상을 거쳐야 효력을 가졌으며,
내각 회의의 의제와 조율을 담당했다.
보어만과 라머스는 당과 정부 양쪽의 관문을 함께 장악하며,
히틀러 주변에 이중 장벽을 형성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SS와 경찰권력을 장악해 반체제 세력을 억누르고,
자신의 제국안보본부(RSHA)를 통해 정보망을 확대했다.
그는 군부에 맞먹는 독자적 군사력, 즉 무장친위대를 확충하며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국민계몽선전장관으로
대중의 감정을 조율하며, 히틀러와 국민을 연결하는 중개자였다.
그는 행정·군수·경제 분야의 직접 권력은 없었으나,
국민 여론과 사기, 그리고 히틀러의 이미지 자체를 장악했다.
이는 전시 독재 체제의 생명줄이었다.
그는 권력자보다는 킹메이커나 조커 카드에 가까웠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비교적 최근 임명된 군수부 장관으로
산업과 전쟁지속능력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그는 짧은 시간만에 전시생산에 큰 개선을 가져왔고,
산업계 인사들에게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고립돼 있었고,
그의 보고와 건의는 보어만의 검열을 거쳐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지탱한 것은 나치 국가의 핵심 원리인
지도자원리(Führerprinzip)였다.
모든 권력은 ‘총통의 의중’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됐고,
히틀러에게 직접 연결되는 채널을 장악한 자가
곧 제3제국의 실제 권력자가 되었다.
보어만은 물리적 접근 차단, 정보 필터링, 측근 포섭을 통해
이 구조를 완벽히 활용했다.
그 결과, 군사·경제의 합리적 보고와 결정을 가로막는
거대한 병목이 형성됐다.
1944년은 이러한 왜곡이 한계점에 이른 시기였다.
전선에서의 승리와 무관하게 내부 권력투쟁은 격렬해졌다.
슈페어와 괴벨스의 접촉은 단순한 불만 토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어만 체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정치전의 서막이었다.
뮌헨 교외, 아름다운 전원 저택. 카렌홀.
한동안 사냥과 수집품 정리에만 몰두하던 헤르만 괴링은
저녁 식탁 위로 번진 전화벨 소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자식이 이 시간에 전화야? 그것도 직통으로?
그는 정비하던 사냥용 소총을 내려두었다.
"여보시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헤르만, 도련님이 넘어왔소.
오래된 사냥을 다시 시작할 때가 왔소. "
전화벨이 울릴 때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전화를 끊고 괴링은 소총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올해는 사슴 구경도 못 하나 했더니… 장비 손질해 둔 보람이 있어.
겨울 사냥은 총보다 수화기로 하는 게 제맛이지."
그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엔드지크 : 1943' 에 이은 '엔드지크 : 1944' 입니다.
'엔드지크' 소개문 : 전략문학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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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지크' 장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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