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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지크] 시리즈
제1부 철혈의 지배
1944년의 장
오프닝 : 카렌홀의 남자
차가운 겨울 햇빛 아래의 뮌헨 교외, 카렌홀 인근의 숲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카렌홀 인근의 사냥용 숲은
오늘은 군용 제복 대신 사냥복 차림의 사람들로 붐볐다.
"탕!"
차가운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눈 덮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총성은 사냥 나팔과 호루라기 소리를 삼켜버렸다.
"브라보!"
"또 명중이군요!
어쩜 이렇게 잘 쏘시는지!"
"으하하, 요령이오, 요령.
적기를 덮치듯, 조용하고… 빠르게!
요즘 파일럿들은 이런 걸 못 배웠지."
헤르만 괴링은 수행원들에게 눈짓으로 지시했다.
그들이 포획한 사슴을 신속히 운반했다.
주위의 웃음과 찬사 속에서 그의 얼굴에는
사냥꾼의 여유와 정치인의 계산이 동시에 묻어났다.
오늘의 사냥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은밀한 대화를 위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만의 사교 사냥인지라 괴링은 사냥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냥이 끝난 뒤, 괴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슴의 뿔을 만지작거리며 손님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숲속의 차가운 공기 위로 멀리 흘러갔다.
"…그렇게 단숨에! 격추해버렸지!"
"대단하군요!"
"역시 각하십니다!"
슈페어가 곁눈질하며 괴벨스에게 낮게 말했다.
"…저 양반, 오늘 왜 이렇게 사냥에만 몰두합니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는지 잊은 건가요?"
사실 슈페어는 사냥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까도 비슷한 부류의 손님들과 함께
카렌홀 내부의 미술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괴벨스는 사냥모자 끝을 가볍게 눌러 쓰며 얇게 웃었다.
"아니, 저게 바로 괴링의 일입니다."
"일… 이라구요?
즐겁게 놀고만 있잖습니까?"
"사람을 모으고, 웃게 하고, 마음을 놓게 하는…
그게 저 사람 방식이지요. 사냥은 그냥 구실입니다."
슈페어는 잠시 괴링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웃음 뒤에서 무언가를 재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혹은 사슴의 뿔 크기를 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녁 무렵, 카렌홀 대연회실.
천장에는 수렵 장면을 묘사한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벽에는 17세기 유화와 중세 기사 갑옷이 걸려 있었다.
붉은 양탄자 위로 하얀 식탁보가 드리워진 긴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에는 은제 식기와 금테 유리잔이 반짝였다.
하인들이 접시를 내올 때마다 좀전에 사냥한 사슴 고기의 향,
꿀과 와인의 달콤한 향이 공기를 채웠다.
진짜 원두로 내린 커피는 기본이요,
요즘은 구경하기 힘든 오렌지와 바나나까지 놓여 있었다.
괴링은 테이블 상석에서 넓은 어깨를 펴고 앉아,
손에 든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 사냥은 훌륭했소!
특히 하우서, 당신. 친위대 사령관은 사슴도 한 방에 끝내는군!
군인들이여, 이런 분을 본받으시오."
"과찬입니다. 저 같은 것을 초대해주신 것만으로 분에 넘치는데
그런 말씀까지 해주시다니요."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파울 하우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면 요즘 떠오르는 우리 젊은 장관님은 다들 아시겠지요?
이런 똑똑하고 합리적인 젊은이들이 나라의 미래요!
총도 잘쏘고 말이오."
"저,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제국 원수님.
오늘 전 카렌홀 내부를 구경했습니다. 정말 좋은게 많더군요.
특히 저기 보이는 그림은…"
슈페어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알아보는군. 저거 비싼 거요! 다빈치였나… 미켈란젤로였나…
아무튼 옛날 사람이오. 중요한 건 값이 어마어마하단 거요."
늘상 말하지만 난 언제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거든!
내가 또 저런거에 환장하지."
괴링은 코를 킁킁거리며 잔을 비웠다.
손님들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슈페어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홀의 전시나 관람 동선부터 뜯어고치고 싶었다.
마치 약탈품 창고처럼 무더기로 쌓인 예술품들을 보고 있자니,
건축가 출신인 그의 눈엔 조금 고역이었다.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제국 수렵총감(Reichsjägermeister)도 겸하고 있다고.
즉, 이번 사냥은 내가 허가한거라 할 수 있지!
근데 그거 아시오? 라머스같은 돌팔이 팬잡이가 수렵총감이었다면
사슴을 잡기 전엔 서류 3장, 도장 4개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겠소?!"
사람들은 또 웃었다.
웃음과 잔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슈페어는 그 말에 담긴 다른 의미를 느꼈다.
그리고 건너편의 괴벨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웃음이 가라앉자, 몇몇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방금 농담이 단순한 농담이 아님을 아는 이들끼리만.
조명이 줄어들고 술에 취해 곪아 떨어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괴링은 수행원에게 고개를 살짝 젖혔다.
마치 오래 준비한 수순을 확인하듯이.
"다과실에서 차 한 잔 합시다."
괴링이 조용히 말했다.
몇몇 인물들이 괴링을 따라갔다.
하지만 다과실의 입구에서 한 사람이 저지당했다.
"아, 볼프 상급대장. 오늘은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수님과 장관님들이 잠시 군수·행정 얘기를 하셔야 해서…
내일 뵙죠."
일반친위대 상급대장 카를 볼프.
오늘 초대받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상관 하인리히 힘러였다.
그러나 힘러는 ‘급한 볼일’이 있다며 불참했고,
대신 ‘내 대리로 가서 분위기만 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그런 급한 일은 없었다.
다만, 힘러에게는 사교장의 번잡한 웃음보다
아넨에르베(SS 부속 연구기관)의 조용한 책상 위에서
룬문자 퍼즐을 맞추는 일이 훨씬 시급했을 뿐이다.
볼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각하, 장관님들. 오늘은 참 좋은 사냥이었습니다.
제 상관께서도 함께하고 싶으셨다는 것을 전해드리고, 가보겠습니다."
돌아서던 그는, 문턱 너머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벽난로 불빛이 비춘 괴링의 어깨와 슈페어의 옆모습이
그의 눈에 짧게 스쳤다.
볼프의 시선에는 충성보다 다른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힘러의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감시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저 안의 판을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몸담은 본능이 속삭였다.
‘지금은 아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오늘은 승부를 걸지 않겠다는 신중한 퇴장이었다.
얼마 뒤, 괴링과 괴벨스, 슈페어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다과실에 모였다.
방금 전까지의 떠들썩한 연회장은 사라지고,
작은 방엔 벽난로 불빛만이 조용히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이곳의 공기는 좀 전까지의 연회장과는 사뭇 달랐다.
"휴, 사냥에 연회에 손님 접대까지. 아주 진이 다 빠지는군. 지쳤소."
괴링은 연회용 조끼를 아무렇게나 벗어 의자에 걸쳤다.
무슨, 아주 신나 있던 주제에.
슈페어의 시선이 반짝이는 조끼에 머물렀다.
실크일 것이다. 값비싸 보였다.
다과실에 모인 이는 단 다섯.
헤르만 괴링 ㅡ 제국원수. 총통후계자.
요제프 괴벨스 ㅡ 국민계몽선전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ㅡ 군수전쟁생산장관.
파울 하우서 ㅡ 무장친위대 군단장.
한스 크랩스 ㅡ 육군참모부 제1차장.
괴벨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방 안을 훑었다.
"자, 이제 농담은 접어둡시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오늘 이 자리, 사슴이나 그림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건 아니오.
우리가 해야 할 건… 베를린의 문을 새로 달아주는 일입니다."
괴벨스의 시선이 슈페어를 향했다.
"문지기를 바꿀 때가 됐다는 말이지요."
시선을 받은 슈페어가 갑자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전 뭘 하면 되겠습니까?"
괴벨스는 말없이 그를 잠시 쳐다봤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빛이 측은했다.
슈페어의 목소리가 방 안에 잠시 울렸다가 가라앉았다.
괴벨스는 잔을 천천히 굴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결론만 얘기합시다. 세부는 차차."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단, 전제 하나. 총통께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분이 다치는 순간, 이 모든 건 무너집니다.
우리는 그분을 지키면서 일을 해야 해요."
괴링이 팔짱을 끼고 웃었다.
"문만 바꾸면 되는가? 나는 집 전체를 새로 꾸미고 싶은데."
그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군부는 내 사람이지. 베를린 방어사령부도 설득할 수 있어.
걱정 말고 나한테 맡겨."
슈페어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저도 뭔가… 보태고 싶습니다…"
괴벨스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보어만과 라머스를 넘어설 ‘명분’을 만들어 주시오.
그건 당신이 제일 잘하잖소. 기업체들 데리고 이야기 하는거.
그놈들이 뭘 막았다, 뭘 못하게 했다… 그래서 생산이 무너진다…
날조도 상관없소. 그리고 그 명분이 총통을 위험하게 해선 안 됩니다."
뭔가 기억난듯이 괴벨스가 잠시 말을 멈췼다.
"...아, 그런데. 하우서. 볼프는 어떤 인물이오?"
"볼프는 단순히 힘러의 전령이 아닙니다.
힘러의 사람인 건 맞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 사람이지요.
그 눈빛… 기회를 노리는 자의 눈이었소.
언젠가는, 우리 쪽이든 힘러 쪽이든 어느 편이든 붙겠지만…
지금은 아닐 겁니다. 만약 포섭이 필요하시다면…"
하우서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괴링이 코웃음을 쳤다.
"저런 기회주의자는 그냥 둬도 괜찮소.
일이 터지면 알아서 움직일거고, 어느 쪽이든 우리한테 나쁠건없소."
괴벨스가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이 쿠데타에는 무장친위대와 일반친위대의 협조,
아니 최소한 방관이 필요하오. 가능하겠소? 하우서?"
"무장친위대는 걱정마십시오.
일반친위대는... 여러모로 손 써보겠습니다."
하우서의 깔끔한 대답에 괴벨스는 마음이 놓였다.
"친위대와의 협조와 연락, 당신에게 모두 달렸소."
듣고있던 크랩스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명분과 병력, 두 가지가 동시에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총통께서 직접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손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건 나와 제국원수의 일이지.
하지만 총통께서 베를린을 나가 계실때 일이 가능한 건 자네요."
"어렵습니다. 최소한만 생각해봐도...
통신대장 펠기벨, RSD(국가안전경호대) 총책 라텐후버,
LSSAH(총통경호대, 무장친위대 사단)의 게슈케…"
크랩스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LSSAH는 나한테 맡기시오. RSD 포섭에 집중하시고."
하우서가 대답했다.
"예. 그러도록 하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근접 경호 담당인 권셰나 시종 린게는 포섭 불가합니다.
참모장 요들은 말이 잘 통합니다. 가능하겠지요"
"당연한거지만 첫째도 둘째도 총통의 안전이 최우선이요.
계속 강조하는것 같지만…"
"알고있습니다, 장관님. 당연하지요."
"좋습니다. 자기 배역은 이제 확실하지요?
일의 순서는 이렇소.
총통 격리. 베를린 점거. 보어만과 라머스, 힘러의 무력화.
이제 세부 진행을 정리해봅시다."
괴벨스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방 안의 얼굴들을 하나씩 바라봤다.
그의 단호한 제스쳐에서 슈페어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치 체제 후반부의 권력은 전선의 승패나 정치력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총통에게 더 가까운가, 누가 정보를 통제하는가,
누가 모임의 문을 통제하는가가 곧 권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렌홀의 사냥과 연회는 그 권력의 ‘비공식 의회’였으며,
다과실 밀담은 그 진정한 모습이었다.
이번 다과실 밀담의 겉포장은 ‘문지기 교체’였으나,
실제 의도는 보어만·라머스·힘러의 권력 제거였다.
결국 이 모의는, 표면상 정치 개편처럼 보여도 본질은 고위 권력자 숙청에 가까웠다.
괴벨스는 히틀러의 안전을 절대조건으로 삼아 작전을 설계했고,
괴링은 군부 장악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슈페어는 명분 창출을 맡았다. 그는 산업체를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하우서는 무장친위대를, 크랩스는 육군 참모진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이 계획은 단순 정치 놀음이 아니라 실제 실행될 수 있는 작전이 되었다.
계획된 작전 순서는 다음과 같다.
총통 격리 – 공식 명분은 ‘암살 기도설’ 유포를 통한 보호 조치.
베를린 점거 – 방어사령부·친위대 사령부의 협조 또는 무력화.
핵심 인물 제거 – 보어만, 라머스, 힘러를 체포·구금.
권력 재편 성명 발표 – ‘총통 의중에 따른 정부 개편’으로 선전.
그러나 실행에는 위험요소가 뚜렷했다.
히틀러 근접 경호(권셰·린게), RSD(라텐후버), LSSAH(게슈케) 등
절대 충성자 계열의 저항 가능성은 높았고,
힘러의 일반친위대·정보기관(RSHA)의 대응은 예측이 어려웠다.
성공과 실패는 단 하나, 그 날 늑대소굴의 문이 어떻게 열리느냐에 달려있었다.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합의를 보는데 성공했다.
"이제. 큰 줄기는 정리됐군. 나머진… 준비하는 우리 몫입니다."
괴벨스는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괴링이 갑자기 막아섰다.
"아니, 가장 중요한게 남았잖소."
"당신의 역할이나 차후 입지는 이미ㅡ"
"그건 당연한거고, 작전명. 거창한게 좋지않겠소?"
회의실의 모두는 잠시 말을 잊었다.
정말? 진심인가?
슈페어가 정적을 깼다.
"…제국 원수께서는 이미 뭔가 염두하고 계신게..?"
“내 제안은… 제2차 장검의 밤!"
괴링이 잔을 단두대를 내려찍듯 책상에 찍었다.
"지난번엔 룀과 돌격대 놈들이었지.
이번엔… 총통관저의 문지기들과 그 졸개들이오."
괴벨스가 잠시 미소를 멈췄다.
“그건 공식 명칭이 아녔잖소. 앵글로 놈들이 붙인…
아니, 하지만 그래서 그 이름을 쓰면…
역사는 절대 잊지 않겠지요.
하지만 어떤 역사를 쓰게 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렸습니다…"
"벌써 근질근질하군.
내가 돌격대를 어떻게 날려버렸는지는 다들 아실거요.
그땐 말이지… 그 놈들 다 쏴 죽이라고 명령했지! 아니, 직접이라도 할 기세였어!"
괴링이 또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자코 듣고있던 슈페어는 몸을 살짝 움찔했다.
‘이건 그냥 정치 싸움이 아니군… 피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냥꾼인지 사냥감인지 아직 모른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양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 아래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멀리서 수사슴 우는 소리가 낮고 길게 들렸다.
그 소리가 사냥당한 동료를 기리려는 건지,
새로이 시작되는 하루에 대한 찬사인지
슈페어는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