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Jean ~ Roncesvalles
그렇게 다섯 시간을 채워, H와 나는 이미 열려있을 생장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 세명의 직원 오른쪽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에는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국기가 달려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같이 직원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영어로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는데, 그는 영어를 말하는 것에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었다.
직원은 우리에게 순례자 여권을 건네줬고 2유로씩을 받았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 조개껍질을 하나씩을 골랐다. 순례자 여권에 앞으로 삼십여 일간 순례길을 걸으며 들르게 될 곳들의 스탬프를 찍게 될 것이고, 가리비는 짊어질 배낭에 걸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증표가 되어줄 것이다.
직원은 내일 우리가 처음으로 걷게 될 순례길, 그 이름도 유명한 ‘피레네 산맥’을 넘게 될 거라는 사실과 함께 그것은 아주 힘든 여정이 될 것이라 일러주며 잔뜩 겁을 줬다.
그리곤 뒤이어, 바로 “부엔 까미노!”라며 행운을 빌어줬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 되세요"라는 산티아고 순례길 위 순례자에게 건네는 인사
오늘은 악명 높은 피레네산맥을 건너야 한다. 지금 내가 위치해 있는 이곳 생장으로부터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여러 가지 루트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프랑스루트'는 피레네산맥을 건너는 첫날이 꽤나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얼마나 어떻게 힘든가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경험하고 체감하지 않는 이상, 상상이 닿지도 가늠이 되지도 않는다.
새벽 다섯 시 기상했다. 기상이라고 표현하기도 뭐 한 것이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은 피곤했는데 설레는 마음 때문인가? 산티아고 길을 시작한다는 설렘인지, H가 내 옆 침대에 누워 있어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양치와 세수를 한 뒤 조용히 짐을 챙겼다.
30여 일간 순례길을 위한 나의 짐은 3kg 남짓 된다.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덕분인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적게, 꼭 필요한 것만을 고심해서 내 곁에 머무르게 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잠깐 머무르다 언젠가 가볍게 떠날 곳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 사용하지 않는 것, 나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과감하고 단호하게 떠나보낼 수 있었고, 또 애초에 그런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몸에 밴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중국에서 10년을 있었다. 지금은 나의 ‘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중국’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 중, 나는 나보다 가벼운 배낭을 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머물렀던 한 알베르게의 주인도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알베르게: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는 마을 곳곳에 위치한 숙박시설
“넌 순례길을 위한 짐이 이게 다니?”
내가 그렇다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어. 동키서비스를 보낸 것이 아니니?”라고 재차 물어보며 확인을 했다.
*동키서비스: 순례길에서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배낭을 다음 장소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
그러더니 내 배낭을 만지작거리며 놀라는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연거푸 하고는, 지금까지 자기가 본 순례자 중 이렇게 짐이 적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내밀었다.
저 두 질문은 알베르게 주인뿐 아니라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배낭 위쪽에 침낭을 묶고 다녔는데, 침낭은 샛 노란색이다. 그래서 산티아고 길 위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노란 침낭’이라고 불리며, 짐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래도 3kg 작은 배낭 속에는 내가 산티아고 길을 걷는데 필요한 물건이 거의 다 들어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배낭을 쌀 때 무슨 물건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는 나름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순례길에서는 알베르게의 침대가 비위생적일 수 있고, 나는 추위를 잘 타는 편이라 침낭은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아마 내가 가진 짐 중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짐이었을 것이다. 부피가 큰 침낭과 크록스 한쌍은 배낭 바깥쪽에 매달았다. O클립을 이용해서 탈 부착하는데 용이하게 했고, 걸으면서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케이블 타이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배낭 안에 있는 의류는 반팔 티셔츠, 속옷과 양말 여분을 딱 한 벌 씩만 챙겼다. 잘 때 입을 얇은 원피스형 잠옷도 하나 있는데, 상, 하의 잠옷이 아닌 원피스형으로 챙긴 것도 짐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또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우비와 우산 중 어떤 것을 가지고 갈까 고민하다, 결국 두 개 모두 챙겼다. 두 개 모두를 챙기되, 그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100g도 되지 않는 초경량 우산을 새로 구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산티아고를 걷던 24년 4월은 축복받은 순례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오지 않았다. 절반 이상을 걸어올 때까지 비가 한 번도 오지 않는 맑은 날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비를 괜히 챙겼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두 개 다 챙긴 것에 후회는 없다. 경량우산은 해가 강한 날 양산 대신 유용하게 사용했고, 우비는 날이 추운 날과 설산을 걸었을 때, 배낭을 멘 상태로 그 위에 입으면 내 몸에서 나가는 열기를 가두어 보온효과를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론 마지막 며칠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그때 내 우비는 보란 듯이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외 헤드랜턴, 아이패드, 올인원 샤워젤과 칫솔 치약, 손수건 한 장, 선크림, 바세린, 기초 화장품 샘플들 그리고 생리컵과 비상약 그것들이 나의 작은 배낭 안에 모두 들어있고 또 모두 들어갔다.
수건은 부피가 너무 크기 때문에 손수건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나는 얇은 손수건으로 내 몸의 물기를 충분히 닦기 위해 가슴께 까지 오던 긴 생머리를 쇼트컷으로 잘랐다. 스타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야 다시 기르면 되는 것이니까.
몸에 기본적으로 착용하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속옷, 양말, 티셔츠, 컨버터블 바지, 경량패딩, 바람막이, 모자, 운동화. 그리고 바지주머니 양쪽에는 핸드폰과 립틴트가 들어있고, 허리에는 얇은 복대 지갑을 둘러메었는데 그 안에는 100유로 정도의 현금과 카드, 여권 그리고 손바닥 만한 수첩과 펜이 들어있다.
바지는 지금 입고 있는 한 장뿐 여분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착용한 바지는 컨버터블 바지로 허벅지 쪽에 지퍼가 달려 긴 바지로 또 반바지로도 입을 수 있는 바지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걷다 보면, 사계절의 모든 날씨를 단 하루 만에 체감할 수 있다. 겨울처럼 추운 아침에는 긴 바지로 입다가,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마치 한 여름과 같이 뜨거워지는데, 그땐 허벅지 쪽 지퍼를 열어 반바지로 입었다.
3kg의 배낭과 지금 착용한 것들, 이것만 있으면 30여 일을 살아갈, 아니 어쩌면 평생을 살기에도 (물론 돈은 더 필요하겠지만)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몸소 증명한 것이다.
다만 가끔 고도가 높은 도시에 머물 땐, 해가지는 저녁이 되면 원피스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기엔 추웠다. 그때 마침 도네이션 박스에서 적당한 면 레깅스를 건졌고 아주 유용하게 잘 썼다. 알베르게 안에 사람들이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가는 도네이션 박스 같은 것이 있었는데, 필요한 것은 거기서 건져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깨끗하고 멀쩡한 것도 많고, 심지어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도 많이 있다.
나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몸에 지니며 걷는 동안 내 어깨를 짓누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렇게 이고 지고 왔던, 언젠가 쓰임이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물건들이 종국엔 필요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네이션 박스로 버려지는 그런 불상사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3kg의 나의 작은 배낭에서 더 이상 추가하거나 빼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고심해서 짐을 꾸렸던 것이다.
내가 나갈 준비를 마친 새벽 다섯 시 반, H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세 명의 순례자들이 조용히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준비를 마친 나는 알베르게를 나와 순례길의 첫발을 땠다. 밖은 아직 많이 어둡다. 헤드렌턴을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바짝 긴장한 나는 몸에 힘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다. 순례 첫째 날이라는 설렘과 긴장감인지, 어두운 새벽 쌀쌀한 공기 탓인지 모르겠다.
어둠을 뚫고, 나는 헤드렌턴에 의지해 노란색 화살표만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갔다. 순례길 위,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 가는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 '노란 화살표'는 약 800km의 여정을 함께하며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그러나 '노란 화살표'의 역할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노란 화살표'가 보이면 순례자들은 불안했던 마음이 잦아들고 큰 위안을 받는다. 낯선 길 위에서 헤맬 때, 적당하게 나타나는 이 노란색 화살표는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다는 확신과 함께 믿음을 안겨준다.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또 계속 걸을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걷다 보면 나는 길 위에서 또 지치고 다시 헤맬 것이다. 그럼 그때, 또다시 노란색 화살표가 나타날 것이다. 이 '노란 화살표'로부터 순례자들은 위로를 받는 것이다.
이것의 반복이다.
이건 방향 표시 이상의 가치를 지닌 순례자들에겐 특별한 표식이다.
오전 일곱 시, 어둠이 걷히고 해가 머리를 들어 올려 하늘을 물들일 때쯤 나는 피레네산맥을 오르기 시작한 것 같다. 경사지는 땅과 오를수록 거세지는 바람이 피레네산맥의 소문을 점차 실감하게 했다. 소문처럼 정말 쉽지 않은 험준한 산맥이었다. 가파른 것은 둘째치고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고도에 비례하는 가파른 낭떠러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조금이라도 휘청거려 잘못 디디면 곧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그 공포감이 산맥을 오르는 내내 온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해발고도 1400m가 넘는 그 산맥을 넘어가는 그날따라 기후가 좋지 않았다. 날은 흐리고 바람은 30kg의 배낭을 이고 가는 체격 좋은 성인 남성도 휘청거리게 할 만큼 아주 거칠고 강하게 불었다. 적지 않은 수의 순례자들이 피레네산맥을 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산티아고 순례를 준비할 때 속으로 ‘설마…’라고 생각하며, 농담처럼 흘려 들었건만, 그 이야기가 진짜임을 소름 끼치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3kg의 가벼운 배낭을 나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회했다. 이 날만큼은 ‘내 가방이 조금 더 무거웠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나는 계속해서 바람에 휘청거리는 내 몸을 간신히 낭떠러지 반대방향으로 옮겨오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것에 내 가벼운 배낭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소리 때문에 정신은 하나도 없고 귀는 먹먹했다. 차가운 바람이 연신 불어 정면으로 맞선 내 얼굴은 뻘게져 얼얼하고 아렸다.
이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자연의 입김조차 맞서지 못하는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미약하고 하찮은 육체를 가진 그런 인간의 정신은 또 얼마나 견고하고 강력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한 것은 ‘게리할아버지’를 만난 이후였다.
피레네산맥을 넘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출발지인 생장에서부터 목적지 론세스바에스까지 약 25km의 산맥을 넘어야 한다. 오후 두 시경, 아침 일찍 출발한 순례자들은 하나 둘 첫날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에스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산맥의 내리막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초반 오르막을 오르는 내내 거센 바람에 맞서느냐 온몸에 힘을 줬던 근육들이 내리막에선 같은 힘을 내지 못했다. 힘이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싶을 때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그때마다 바람은 다시 세차게 불고 계속해서 나를 주저앉혔다.
그 내리막에서 내가 겨우 한 발자국 떼었을 때, 묵직한 바람이 낭떠러지 쪽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낭떠러지 코앞까지 순식간에 떠밀렸고, 순간 앙상한 나뭇가지를 붙잡아 겨우 내 몸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을 때, 나는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심장이 요동치며 섬뜩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같은 낙사(落死)라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선 그 공포감이 다르게 밀려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겁을 잔뜩 먹은 채,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보다 뒤에 있던 순례자들이 하나 둘 나를 제치고 앞서 지나갔다. 그렇게 지나쳐가는 어떤 순례자도 다시 뒤를 돌아보며 내 이 겁먹은 얼굴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고, 그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그때였다. 나를 지나쳐가던 서양인 남녀 한쌍이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지쳐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여자가 거센 바람소리를 이겨보겠다는 듯 힘껏 소리를 내며 묻는다. 마치 구조 대원처럼 두 사람은 나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아니요…”
내가 울먹이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하자, 그들은 내 양옆으로 와서는 나를 가운데 두고 내 팔짱을 껴, 앉아있던 나를 번쩍 일으켰다. 그렇게 세 명이 딱 붙어 한 몸이 되었다. 그 상태로 바람에 맞서 내려가니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그 거센 바람 속에서, 그들은 나에게 코어에 힘을 주고 무릎을 굽혀 바람의 저항을 줄일 수 있도록 자세를 최대한 낮춘 다음 걸어가라며 알려주었다. 내가 휘청거리면 그들은 곧바로 나를 붙잡아 다시 자세를 고쳐주었다. 다시 가파른 내리막이 보이면, 우리는 셋이서 팔짱을 단단히 끼고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몸이 되어 내려갔다.
나를 도와준 이 남자는 프랑스에서 온 바티스트. 여자는 이탈리아에서 온 까밀라. 그 둘도 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라고 했다. 까밀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프랑스인이라고 했다. 남자친구 덕분인지 프랑스어에 능숙한 까밀라는 바티스트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로 소통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내리막에서 만난 나와는 다 같이 영어로 소통했다. 셋 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실력 덕분에 우리는 갖가지 바디 랭귀지를 사용하며 대화했는데, 그 덕분에 긴장이 가득했던 온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걸어가던 중, 위태로워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났다. 두 친구는 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그 노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 친구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노인의 이름은 게리였다. 게리할아버지는 미국인이고, 나이는 85세다. 그는 나보다 더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이 피레네산맥을 건너고 있었다. 무릎은 절뚝거렸고, 얼마나 넘어졌던 것인지 디뎠던 손 이곳저곳에 피가 맺혀 있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목적지인 론세스바에스의 알베르게까지 약 5km 정도밖에 남지 않은 구간이었기에 난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길고 험준한 여정을 이 노인은 혼자서 여기까지 이 짐을 짊어지고 온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넷이 걷게 됐다. 거동이 불편한 게리할아버지와 속력을 맞추느냐 우리의 걸음은 한 템포 씩 느려졌다. 그렇게 느려진 속도도 게리할아버지는 마치 우리에게 속도를 맞추는 것 마냥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것을 눈치챈 바티스트가 게리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배낭을 제가 들어드려도 괜찮을까요?”
그 질문은 배낭을 그가 들게 됐을 때 게리할아버지의 순례자로서 자존심을 건들게 되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묻는 매너 있는 질문의 형태였다. 일종의 남자 간의 자존심까지 배려하는 말투였다. 다행히도 게리할아버지는 그래도 되겠냐며 고맙다고 하고 그에게 배낭을 건네주었다.
배낭의 무게만큼 가벼워졌을 게리할아버지의 발걸음은 그 덜어진 무게만큼의 속력을 올리지 못했다. 여전히 무릎은 절뚝거렸고 숨도 거칠었다.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고 기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 노인은 그곳에 온몸을 맡겨버렸다. 덩달아 우리도 강제 휴식을 취했다. 그 덕분에 고작 5km를 앞둔 거리에서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맨틱한 게리할아버지는 아내 이야기와 가족이야기를 주로 했다. 자신이 이 피레네산맥을 넘어오며 찍었던 사진들을 돌아가면 꼭 아내에게 보여줄 것, 얼굴만 보고 짐작했을 내 나이를 추측해 그의 손녀가 나와 비슷한 나이 일거라는 것 등의 이야기…
시간은 계속해서 지체됐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내 걸음으로는 목적지가 코 앞인데, 도저히 속력이 나지 않자 슬슬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전날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두 명의 친구에게 물으니 그들도 예약을 했다고 했다. 문제는 게리할아버지였다. 알베르게를 예약하지 않았다면, 선착순으로 남은 침대를 배정받을 텐데, 지금 이 속도라면 침대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바티스트는 총대를 멨다. 먼저 뛰어가서 알베르게의 남은 침대를 사수하겠다고 했다. 오로지 게리할아버지를 위해서…
나도 안다. 이 85세의 노인이 젊은 사람도 넘기 힘든 피레네산맥을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건너왔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 대단하고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우리와 아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나도 이 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게리할아버지를 보고 멈춰 섰을까?
먼저 뛰어간 바티스트의 선의는 우리 둘에게도 남겨졌다. 까밀라와 나는 게리할아버지의 배낭을 번갈아 가며 짊어지고 그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까밀라는 그 배낭을 앞으로 맺다. 바티스트가 짊어졌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앞, 뒤로 두 개의 배낭을 멘 까밀라의 모습은 꽤나 버거워 보였다. 나는 게리할아버지를 부축해 앞으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내 팔목을 잡은 그 노인의 손 또 다른 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삼십 여분이 지나고 우리는 역할을 바꿨다. 내가 게리할아버지의 배낭을 건네받고, 까밀라는 그를 부축했다. 이 배낭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85세의 노인이 짊어질 것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피레네산맥을 이 날씨에, 이 짐을 짊어지고 건너고 있다니…
이 노인이 800km를 걸어 순례자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기어코 뜯어말려 붙들어 메고 싶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충분히 대단하다고… 주변사람 걱정시키지 말고 이제 그만하라고…
까밀라와 나는 그렇게 몇 차례 더 반복하여 역할을 바꿔가며 분담했다. 그렇게 바티스트가 떠나고 약 세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의 눈앞에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에스의 알베르게가 보였다. 내 팔뚝을 붙잡고 계속해서 거친 숨을 내쉬는 게리할아버지에게 나는 목적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제 다 왔다고 조금 더 힘을 내라고 말했다.
그때 까밀라와 나는 게리할아버지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 눈빛 속의 까밀라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먼저 뛰어간 바티스트가 침대 선점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게리할아버지는 또 다음 도시로 건너가야 했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게리할아버지는 아마도 포기하겠지…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니 먼저 간 바티스트가 입구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그.
“침대를 선점하지 못했어요…”
고백하는 그.
까밀라와 나는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곤 아직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게리할아버지의 표정을 바라봤다.
그러나 갑자기 얼굴을 바꾸며 바티스트가 말했다.
“왜냐하면… 침대가 아직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제야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론세스바에스의 알베르게는 규모가 굉장히 컸고, 예약하지 못한 순례자를 위한 침대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게 게리할아버지의 알베르게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우리는 각자 예약한 알베르게의 침대 자리로 하나씩 흩어졌다.
나는 배정받은 침대자리로 간 뒤, 리셉션에서 받은 일회용 시트를 침대 위에 깔고 잠시 누웠다. 너무도 긴 하루였다. 온몸이 축 늘어지고 긴장이 느슨해졌다. 땀을 많이 흘려 그런지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면서 으슬으슬 떨렸다. 이대로 잠들면 몸살감기에 걸릴 것 같아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짐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목욕용품과 빨랫거리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공용샤워실 칸막이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적셨다. 온몸이 녹으면서 나른 해졌다. 피로도 같이 씻겨나갔다. 동시에 땀이 흘렀다, 말랐다 수십 번 거쳤을 티셔츠와 속옷들을 빨았다. 그렇게 오늘의 할 일을 마치고 개운해진 몸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코스를 신청해 두었다. 순례자 코스요리는 약 15유로 정도의 금액으로 순례자들에게 제공된다. 알베르게나 순례길 위의 음식점 등 순례자가 닿는 곳에서 순례자 코스요리가 있는지 물어볼 수 있고, 오늘의 순례자 코스요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세 코스로 요리가 나오는 데다가 대부분 와인과 식전 빵도 포함하고 있고, 값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순례자들에게는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종업원이 애피타이저와 메인메뉴를 고르라고 한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파스타, 메인으로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골랐다. 그리고 식전 빵과 레드 와인, 디저트로는 케이크가 제공되었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허기짐을 느꼈지만 생각만큼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와인으로 어떤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 길고 긴 하루였다. 살짝 취기가 올라온 탓인지 그 모든 감정들이 뚜렷하게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또, 이상한 길이다…
이 엄청난 감정이 오늘 단 몇 시간 안에 느낄 수 있는 것이라니…
식사를 마치고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채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저녁 아홉 시가 넘어가는데 밖은 이제야 해를 내리고 어둑어둑 해지려는 참이다.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이르다는 듯, 길고 긴 해가 끝에 걸려 어두운 밤 배경을 보색으로 물들일 때였다.
게리할아버지는 마치 새로운 건전지로 갈아 끼워 넣은 것처럼 그렇게 기운찬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렇게 나에게 명예칭호를 수여하는 노인.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향해 말했다. 바티스트와 까밀라 두 친구들은 진심으로 게리할아버지를 도왔고 또 나를 도왔다. 나는 과연 진심으로 이 노인을 도운 것일까? 내가 진심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수여식 기념사진을 남기듯, 게리할아버지는 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포즈를 취한 내 사진을 몇 장 찍은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에게 이 사진을 꼭 보여주고 “이 아이가 내 ‘생명의 은인’이야”라며 그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게리할아버지…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곧바로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그와 얼굴을 맞댄 셀피 몇 장을 더 찍어 드렸다. 그 사진들은 ‘생명의 은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아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마 그렇게 회자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가슴이 찡한 것인지 아니면 가슴을 찔린 것인지 모를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나는 게리할아버지에게 "내일도 계속 걸으실 거예요?"라고 물어보려다, 놀랍도록 멀쩡해진 게리할아버지의 상태를 감안하여 질문을 바꿨다.
“게리할아버지, 어디까지 걸으실 거예요?”
그는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곤 나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야지!"
대답을 하는 그 노인의 눈이 일곱 살 아이와 같이 너무도 맑고 반짝거려, 또는 스무 살 청년과도 같이 열정이 넘치고 한치의 흔들림이 없어, 나는 오후에 했던 '게리할아버지를 말려야 된다'는 그 생각을 고쳐 먹기로 마음먹었다.
이 날 이후로 나는 게리할아버지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게리할아버지는 분명 자기만의 속도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걸어갔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에게 게리할아버지의 연락처도 이메일도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와 나는 이제 연이 닿을 수 없을 것이고, 나의 진심을 고백할 날 또한 없을 테니까...
그저 가끔씩 나는 그 노인이 생각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