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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의 것 - 류시화

답시를 올립니다.

by 쏘리
류시화.png


p. 48


외딴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 외딴집에 살았던 여자

그 여자의 침묵은 대답이었다.)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깻죽지에서 피어오르고


(* 원래 있었던 나른함과 권태였음에도

유달리 왜 다르게 느껴졌을까)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 산책을 좋아하던 내가 산책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산책길을 찾으려 애를 썼다.)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붉은 꽃들


(* 세상에 다양한 꽃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꽃만 꽃이 아니라 사람 또한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 그의 그림자를 밟아 본 적이 없다.

그림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그 그림자가

왜 보이기 시작했을까. 왜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을까.)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 이리저리 엮어있는 연리지 나무처럼

반항하지 않으면 나도 엮여 버리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 시간은 해결사가 아니다.)


나와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 마주치려 애썼지만 절대로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 태양만 부풀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둥글고 딱딱한 것


(* 딱딱한 어깨, 딱딱한 생각, 딱딱한 마음

어디다 버릴지 몰라서 다른 것들을 죄다 버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한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언제 다 버릴 수 있을까.

너무도 버리고 싶은데 말이다.)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 내려와


(* 들뜬 사람들 사이로

가라앉아버리게 된 나는 쉬운 길이 보여도

선 듯 가지를 못한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내 발 앞을 지나쳐 간 남자


(*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비켜서니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 온전히 자기만에 생각에 갇혀버린 나)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려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 하게 한 세계를 준다.


(* 밟힌 흙들을 털어내기도 전에

다른 흙들이 또 밟히게 되면서

뒤엉켜 버리고, 어떻게 털어야 할지도 모르는 세계를

나는 마주해 버리고)


그는 왜 모자를 써을까

왜 모자로 얼굴을 반을 가리고 있을까


(* 누군가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게

왜 싫어졌을까. 왜 이제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졌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나는 그것을 안다


(* 꿈을 더 이상 꿀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땐

나는 얼마나 많은 꿈을 꾼 건가)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 번도 내려가 보지 않은

강 아래쪽 풍경과

한낮의 수증기와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서

나가보니 색다른 풍경과 시간들이 펼쳐지고

내가 살았던 세상이 맞았나 계속 두리번거리게 되고

어딘가 이르렀을 때 들었던 생각

어디에 가도 나는 어딘가를 또 가고 싶어 하겠구나를

알게 된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 온전히 나만 남아있는 세상

무인도에 있으면 이런 기분인가

미끄러져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세상)


내가 걷는 강 아래쪽으로 떠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내려 왔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는 눈을 감게 되고)


햇빛을 피해 얼굴을 물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물잠자리도

그의 것


(* 얼굴을 처박아도 더 처박고 싶었던

내 뒤통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박게

하고 싶었을까.)


이미 그는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 이제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숨겨버렸다.

그때 그 순간들을 모조리 처박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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