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지 아닌지 매주 주말마다 교외로 여행을 다녔던 우리였기에 그녀는 담양으로의 1박 2일 여행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날따라 하늘은 말 그대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보성의 녹차밭은 싱그러웠고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은 연인들로 붐볐다. 그 속에서 그녀는 웃고 또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만 싶어졌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여행을 같이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우리를 감쌌을 때, 나의 이별을 시작했다.
“란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아직 못한 말이 있냐며 되물어보는 그녀의 말에 내 고개는 땅을 향해 한없이 내려간다. 이미 떨어진 입, 이별할 각오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한 번도 이성에게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기에 쉬이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서 더 나아가기로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내 머리카락들아. 내게 힘을 줘.
“나 탈모야.”
그녀는 쉬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 괜찮은데? 지금부터라도 잘 관리하면 돼” 그녀는 이 말과 함께 내 가발을 어루만지려다
“지금 이 머리, 가발이야”라는 나의 말에 다가오는 그 자세로 멈춰 서버렸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따라 마음도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그저 농담이야 하고 웃으며, 그걸 또 믿었어? 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먹던 고기를 마저 마고, 마시던 술을 마저 마시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 그녀를 으스러지듯 껴안고 잠이 들고만 싶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대머리는 아니었어. 어릴 때는 머리숱이 많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그런데 스무 살 때부터 갑자기 빠지기 시작하더니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더라.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울던 거 기억나? 그거 대머리라는 사실을 속이고 널 만나기 때문에 미안해서 그랬던 거야. 너랑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조금만, 조금만 더 이 시간을 잡고 싶었어. 그동안 속여와서 미안하다. 그리고 너와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란아.”
담담히. 솔직히. 동정심으로 란이가 아프지 않게.
란이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한참이란 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만은 모든 것이 멈춰 선 것만 같았다. 불 판에 올려진 고기가 익는 소리, 바람 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내 입에 머금고 있던 침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 일 초 일 초의 순간들이 내 감각을 건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순간이었고 영원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란이의 입이 떨어졌다.
“10대 때 빠지든, 20대 때 빠지든, 50대 때 빠지든, 살면서 언젠가 한 번은 빠지는 건데 네가 조금 일찍 빠졌다고 생각할게. 나는 괜찮아.”
머리가 빠지고 나서 처음으로 괜찮다는 말이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괜찮다고 할수록 괜찮지 않았던, 이미 빠질대로 빠진 머리와 같이 황량하여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 같던 내 마음속에 한 줄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란아. 그럼 우리 안 헤어지는 거야?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는 거야?”
“헤어지길 뭘 헤어져. 빨리 눈물 닦고 식탁 정리하게 부엌 가서 행주 가져와. 당장 뚝 안 그치면 헤어질 줄 알아”
그날 밤 란이의 새근새근 숨소리를 벗 삼아 난 참 달콤한 꿈을 꿨다. 물론 잠자는 중간중간 자꾸만 벗겨지려는 가발을 부여잡아야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