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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늘도 좋구나'

지도에 없는 섬 X아일랜드 연재 중

by 여온빛

해가 지고 다음 아침 날이 밝았다.

여기 온 후로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하늘빛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침의 하늘의 빛깔과 저녁노을녁의 하늘의 빛깔이 항상 다르다. 나는 그것을 이곳에 와서 처음 깨달았다.


이전에는 난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정도로 많이 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점점 내가 그동안 알고 있다는 것들이 정말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 살 때, 아침의 하늘과 저녁노을의 하늘을 본 적이 있었는가?


이곳에서 맞이했던 아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웅장하면서 이 세상의 빛이 아닌 빛깔을 물들여놓은 그 모습은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지게 했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 사람들이 너무너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존재 앞에 자동 무릎 끓여짐 같은 느낌.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빛깔들이 매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다 살아 있는 것 같다. 정말 살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어찌 매일, 아니 매 순간마다 다른 빛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그 빛들은 내게
'오늘도 좋구나~오늘도 좋구나~'

잔잔한 변주곡으로 시작해서 웅장한 개선곡으로 연주한다.

세상은 웅장하고 나는 그 앞에 참으로 작다.

세상은 신비롭고 난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세상은 좋다고 얘기하고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다. 그런 세상 안에 나는 존재하고 오늘도 좋다고 말하는 세상이 이 작디작은 내게 그 정도의 좋음을 주지 않을 리 없다.


세상은 크고 큰 빛은 이 세상을 덮고 있고

그 빛 속에 작은 내가 있다.

너무 작은 내게 큰 세상이 아주 조그마한 아량만 베풀어도

내겐 우주를 덮은 것 같은 충만함일 테니…


'그래, 내가 12년 겪은 모든 것이 다는 아닐 거야.'


이 작은 내가, 아주 작은 일부만 산 내가 겪은 모든 것을 다 긁어모은다 해도 이 세상에 비한다면 보이지도 않은 점일 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그런 내가 이 세상은 나쁘다.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난 이 세상을 모르고 이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미스터리이다.


그런 세상이 내게 한결같이 오늘도 좋다고 말한다 그동안 하늘의 빛들이 공기를 타고 내게 말하려던 것이 이것일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냥 너무 좋다. 기쁘다. 내 가슴이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거워진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때 아닌 때 눈이 오던 날,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만’이라고 하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난 할아버지처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기상천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스르르륵 스르르륵 나뭇잎들의 합창 소리를 들으며 길을 따라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


어제보다 나무들의 색이 더 울긋불긋 해진 것 같다. 그리고 마른 잎들의 소리를 더욱 경쾌하다. 이들에게는 죽음도 슬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은 이 세상에 보내진 자체가 감사하고 기뻐하기만 하려고 태어난 존재들 같다. 나도 이 나무였다면 이 나무에 달린 하나의 나뭇잎이었다면… 낙엽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그것은 이들을 전혀 모르는 데서 온 잘못된 편견이었다. 이들에게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다. 이들에게는 기쁨의 노래만이 있고 끝까지 본분에 충실함이 있다.


마른 잎들은 저마다 서로 맞춰가며 온몸을 흔들고 그 열심에는 이러다 내가 저 아래 땅으로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나 걱정은 전혀 없다.

그저 본분에 이토록 최선을 다 할 뿐이다.

혹 정말 낙엽의 운명으로 바뀐다 하여도 이들은 그 순간까지도 기쁨의 춤을 춘다.


그 생에 가장 아름다움을 뽐내는 최고의 독주 최고의 춤선으로 낙하하며 땅에 떨어진 후에는 그저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겸손히 맡긴다.


내가 그동안 어두운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온 것을 이제 나는 너무 잘 알게 되었다. 내 앞에 떨어지는 한 나뭇잎에 한참 못 미치는 나의 마음을 이들의 삶의 태도에 맞춰보고 싶다는 하얀 마음이 내배 깊숙한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발걸음은 어느새 까만 바위가 있던 그곳에 닿았다. 해안을 따라 저쪽 끝자락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일까 궁금해져서 들키지 않을 만큼 그쪽으로 슬슬 가보았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며 인사의 손짓을 한다. 이리로 오라는 손짓으로 바뀌어서 나도 용기를 내어 가보았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기도 한 어제 그 하얀 할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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