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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얀 할아버지와 생선꾸러미

무너지는 나의 확신의 탑

by 여온빛

그 나뭇잎을 보면서 이런 복잡 미묘한 마음이 내 온몸을 감쌌다.

코를 훌쩍거리는데 내 코를 찡긋하게 만드는 짠 냄새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계속 물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때문인지 눈을 찡긋했다.

반쯤 뜨고 앞을 보니 내 까만 바위도 저기 보였다. 그 까만 바위로 조심히 걸어갔다.

어제 그 위에서 계속 만지작했던 작은 돌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까만 바위 위에 앉았다. 왠지 그 까만 바위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엄마하고 함께 앉아서 얘기하고 놀던 우리 집 회색 소파가 생각났다.

바닥이 차갑다며 엄마는 내게 항상 소파에 앉아 놀게 했다. 내 기억과 함께 항상 있던 회색 소파였다.


그곳에서 엄마는 내게 밥도 먹여주고 책도 읽어주고 같이 놀아주었던 곳이다.

난 언제나 내 좋은 시절 추억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회색소파에 있는 나와 엄마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생각 일 뿐이다.


‘이젠 기억 속에서도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어..’


내 뇌를 열고 그 기억의 작동을 멈추거나

도려 빼내고 싶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가슴이 아프게 아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지금 이 까만 바위는 따뜻해서 좋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철썩거리는 물 부서지는 소리가 리듬에 맞춘 음악 소리처럼 나를 진정시켜 준다.


‘다 잘 있겠지..’


‘잘 있구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내 안에 괜찮아 메아리가 계속 들려온다.

마치 엄마 무릎 위에 머리를 댄 것처럼 난 안전하고 편안하다.


엄마.. 엄마.. 보고 싶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자,

저 멀리 바다에서 온 하늬바람이 내게 말한다.


‘괜찮아.’


그리고 그 바람이 내 눈물을 집어간다.


그래 이 까만 바위만 있다면 난 좀 더 이곳에서 버텨낼 수 있겠어.. 얼마 전보다 나아진 거 같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순간도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도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 버거웠는데 이제는 하루를 견딜 만하고

지금 느낌은 내일도 괜찮을 거 같다.


얼마전까지 영원히 잠드는 것을 소망했다면,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 바위보다 더 딱딱한 응어리 같던

내 가슴이 좀 부드러워진 거 같다.


물소리가 바람소리가 가끔 울어주는 바다새 소리가 내 옆에 있고 나를 감싸주고 있다.


엄마… 엄마…


“얘야~ 얘야~ 이제 일어나 가자꾸나~ 장시간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얘야~ 일어나 보렴~”


눈을 떠보니 큰 그림자뒤에서 내려오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손으로 태양 빛을 가리고 다시 올려다보니 누군가 분명 있었다.

내가 그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온통 흰색이라 난 내가 다른 세상으로 온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흰머리에 흰 수염에 흰 옷을 입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어떤 그림자도 없는 편안함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누구지? 파도소리와 물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 아직 나는 까만 바위 위에 있는 거 같았다.


몸을 돌려 일어나려는데 등이 베여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하얀 할아버지가 내 문제를 아시는지 내 등을 손으로 바쳐 주며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셨다.


“얘야. 오랫동안 이런 바위 위에서 바닷바람 맞아가며 자고 있으면 좋지 않단다.

이제 해도 넘어갈 때가 되었으니 어른들 걱정하지 않게 어서 집에 가보거라.”


“네..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로 이동된 거니?”


“네..”


“그렇구나. 날도 점점 추워지고 있단다. 빨리 집에 가봐야지”


“네..”


“너는 이쪽 나무숲길로 가지?”


“네..”


“그래. 이건 아까 잡은 물고기인데 좀 가지고 가거라 집에 가서 맛있게 구워달라고 하거라.

구워 먹으면 아주 고소하고 맛있단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조심히 가거라. 오늘도 아주 좋구나


그 하얀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손에 물고기 세 마리가 꿰어진 끈을 들려주고

오늘은 아주 좋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걸어가셨다.


맞다. 오늘은 내게도 좋다. 좋다는 말을 생각해 본지도 들은 지도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던

그 말이 계속 내 귓가에 맴돈다.


“오늘도 아주 좋구나, 오늘도 아주 좋구나..”


아까 지나와서 그 나무 사잇길을 걸으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들썩임을 느꼈다.

너무 안 움직였나. 근육이 생기를 얻으려고 바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확실히 나쁠 거라 확신했던 것들, 내겐 어떤 희망도 없을 거란 확신들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내가 스스로 만든 나의 굳건한 확신의 탑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내 눈물을 집어갔던 바람이 다시 한번 내게 오자,


내가 쌓아왔던 그 탑은 바위에게 와서 부서지는 하얀 파도처럼 바벨탑 무너지듯 우르르 한순간에 무너졌다.


안녕 잘가 바벨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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