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어려운 나라, 폴란드

어떻게 읽어야 할지,

by 파란선


소통이 어려운 나라, 폴란드


마치 마사지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독일에서 출발한지 10분만이다. 한국에서 독일까지 꽉 찼던 좌석들과 다르게 갈아탄 소형 비행기는 중간중간 좌석들이 비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비행기 날개에 달렸던 프로펠러의 영향으로 내 의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개에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 탑승은 처음이었다. 무표정의 키 큰 승무원 언니 두 명은 차가운 치즈 샌드위치 한 개와 음료수를 승객들의 의향과 관계없이 나누어 주었고, 조금 후에는 쓰레기만 거두어 갔다. 이런 상황에 적응 되었을 때 즈음에 나는 폴란드에 도착했다. 알아듣기 힘든 폴란드식 영어와 폴란드어로 안내 방송이 두번 흘러 나왔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한 채 몇몇 승객들과 함께 작은 비행기에서 내렸다.


‘WROCŁAW’


작은 공항이었다. 솔직히 도시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영어식으로 읽자면 ‘로크로우' 정도로 읽혀졌다. 비행기가 착륙한 곳에서부터 공항까지의 버스는 없었다. 승객들은 당연하다는 듯 회색빛의 텅빈 비행장을 걸어 ‘WROCŁAW’ 라고 써 있는 건물, 그러니까 공항처럼 보이는 건물까지 걸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는 내 발걸음보다 먼저 보인 것은 인천 공항에서 스무시간 전쯤 부쳤던 여행가방이다. 몇 안되는 여행가방들이 이미 짐차에 옮겨져 공항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마치 외딴 섬나라의 작은 공항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나는 공항으로 들어가자마자 여행가방을 찾는 행운을 집어 들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분명 7월말 여름이었는데, 안개 끼고 스산했던 날, 작고 낡은 공항, 빠르게 속삭이는 폴란드어, 어수선한 사람들, 오래된 회색 건물들은 내가 아는 유럽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던 택시 기사와는 바디랭귀지로 인사를 나눈 후 도착한 숙소는 시외곽에 위치한 숲 속의 호텔이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던 공항에서 그 숲 속의 호텔로 가는 내내 본 것은 총탄 자국이 있는 회색 건물들이나 텅 빈 공터들 이었다. 도착 후 만난 호텔은 개인 주택을 개조한 듯한 곳이었고, 주인이자 직원인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비타미 브 폴체, 진도브레, 프로쉐 베이시츠 witamy w Polsce ,Dzień dobry, proszę wejść! "

( 폴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

“Co to jest? (이게 뭐예요?)”

“Czy to Twoja torba?( 이건 당신 가방인가요?)”

“Jak masz na imię?(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마치 ‘ 쉬비쉬비췌 쉬비쉬비췌 쉬비쉬비췌’ 가 끊임없이 연속되는 느낌이었다.

"하..이이.., 나이스 투 미츄, 땡큐."

어쩔 수 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 대신 짧은 인사만 건넸다.


비록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지만, 동양에서 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건넨 환영인사와 질문들은 매우 빠른 속도의 평생동안 들어보지 못한 언어였다.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호텔 주인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나를 바꾸어 주었다. 나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내 준 학교 비서 ‘카샤'였다. 카샤는 환영한다는 인사와 신분증 확인을 해 달라는 호텔 주인의 요청을 영어로 알려 주었다.

호텔 주인으로 보이는 부부는 그제서야 영어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했다.

“No English. sorry. sorry (미안하지만 영어 못해요.)”

비행기에서 먹은 차가운 치즈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로 허기가 졌지만, 더이상 카샤에게 전화 하여 귀찮게 할 수 없었다. 결국 바디 랭귀지나 영어 소통이 쉽지 않아 저녁거리를 해결하지 못한채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생수 한병이 호텔방에 있었기에 물 한잔으로 허기뿐만 아니라 불안했던 마음까지 함께 달래야만 했다. 폴란드에 도착한 첫날은 생각치 못한 소통의 불통으로 기분이 다운되고 말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근무하는 폴란드인들의 도움으로 휴대폰 유심칩 구매과 거주증 등록 등을 마칠 수 있었다. 거주증 등록이 되었다는 증명서로 은행 계좌도 열고, 학교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에 계약을 할 수도 있었다. 매우 느린 폴란드 시스템으로 일년짜리 실물 거주증은 7개월 후 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해야 할 때마다 학교 비서인 카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폴란드 거주 첫해에는 도착한 첫 날처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의 폴란드에는 일상생활 속 환경이나 물건들에 영어로 표기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폴란드어는 영어와는 매우 다른 언어였기에 함부로 추측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사과는 ‘얍코 jabłko’ 이라고 하며, 물은 ‘보다 woda’ 라고 한다. 폴란드어 단어에서부터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물며 단어를 알았더라도 발음이 매우 어려워서 따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나의 경우 거주 4년차까지 그 어떤 폴란드어도 ‘쉬비쉬비췌’로 밖에 안 들렸다. 하나에서 열까지 폴란드 지인들이나 카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같이 입사한 동료교사들도 나와 같이 처음 겪는 언어와 문화에 많은 어려움을 당면하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2주전부터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여러가지 교육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컬쳐 쇼크 (Culture shock)’라는 주제를 가진 워크샵이었다. 폴란드에서 겪을 낯선 문화, 생활 방식 또는 일련의 태도에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알려주고, 폴란드 문화와 역사를 통해 외국인으로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폴란드에서의 첫 해, 나는 직장에서 겪는 일 외에도 음식, 문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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