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와 카스피해를 곁에 두다니,
불의 나라 , 아제르바이잔
폴란드 거주 10년 차, 2015년에 우리는 새로운 집이 될 곳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정하였다. 편안하고 익숙한 곳을 영원히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매년 갱신해야만 했던 거주권 대신 임시 영주권을 준다는 제안까지 거절하며 폴란드를 떠날 명분은 우리에게 가족이 생긴 후였다. 폴란드에서 두 아이를 낳고, 많은 일을 겪으며 행복하였지만, 채워지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모국어와 문화를 알릴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폴란드 생활을 접고 한국에서 살다가 뉴질랜드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폴란드 화폐의 가치였다. 뉴질랜드이든 한국이든 살 집을 마련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 당시 결혼한 주변 지인들은 은행 대출을 통해 주택이나 아파트를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화폐가치가 낮은 폴란드에서 월급을 받아 생활하면서 휴가 때마다 근교 쉥겐 국가들인 독일이나 프랑스 등을 여행하느라 대출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자금조차 없었다. 통장은 월급날에나 겨우겨우 채워지고는 했다. 저축 대신 자유로운 유럽 여행을 택하였던 우리에게 고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먼저 아이들을 위하여 한국에 소재하는 국제학교로 교직을 신청해 보았지만, 북미권 교사들을 선호하는 한국 국제학교의 문턱은 매우 높았다. 아쉽게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접어야만 했다. 4인 식구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저축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톰슨 씨가 폴란드 근무 6년 차부터 교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국제학교 교사들을 고용하기 위하여 캐나다, 미국, 런던 등 각종 에듀케이터 잡 페어(교사 직업 박람회)들을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석유회사가 모여 있는 나라 즉 석유나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산유국들의 국제 학교는 교사당 매우 높은 연봉을 책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장직과 미술교사 부부라는 패키지로 교직을 함께 신청하였다. 숙소를 연봉 패키지에 포함시키는 대부분의 국제학교들은 월세를 아끼기 위하여 커플 교사를 선호하였기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운 좋게도 톰슨 씨가 출장차 다녀왔던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에 있는 IB 스쿨로 승인된 국제 학교에서 면접 요청이 들어왔다. BP(British Petrol) 재단을 둔 이 학교에서는 톰슨 씨를 초등학교 교감으로, 나를 초등학교 저학년 미술교사로 고용하였다.
우리가 아제르바이잔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아제르… 뭐라고요?"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인지도가 낮은 나라였다. 나 또한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선뜻 갈 수 있는 용기를 낸 이유는 ‘폴란드와 비슷한 옛 소련국’이라고 했던 톰슨 씨의 말 때문이었다. 10년 동안 적응하여 그들의 문화와 음식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내게 ‘폴란드와 비슷한 나라'라는 말이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아제르바이잔에 처음 도착한 8월의 온도는 40 도였다.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택시 기사들이 공항에서 나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Heydar Aliyev International Airport’라고 적힌 멋지고 세련된 바쿠 공항에는 생각보다 적은 승객들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많은 국민들이 해외로 나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하며 절차가 꽤나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고 하였다. 바쿠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약 30여분이 걸렸으며 시내 곳곳에 그곳의 언어와 영어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언어가 큰 장벽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의 공식 언어인 아제리어와 함께 쓰이는 러시아어는 폴란드어와 비슷한 단어가 많은 슬라빅에 속하기 때문에 놀랍게도 그들의 말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사택까지 가는 길은 마치 펼쳐진 사막 위에 세워진 오아시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휑한 토지만 보였던 시 외곽과는 달리 시내는 유리로 지어진 높은 빌딩들, 유럽 스타일의 건물들과 빨간 지붕의 주택들, 브랜드 호텔 등 우리가 늘 보는 도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수도인 바쿠는 함호수에 속하는 카스피해와 접한 항구도시로 시내에서도 카스피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가깝게는 러시아, 조지아, 이란, 아르메니아를 옆에 두고 있다. 실제로 옛 소련국이었던 것은 맞으나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러시아의 문화가 섞인 나라이다. 그들의 생김새, 아제리 언어, 종교, 홍차 문화, 음식 문화 등은 터키와 유사하다. 불의 나라라고 불리는 아제르바이잔은 석유를 생산하는 동시에 땅속에서 자연적으로 분출하는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카스피해에는 정제소 시설, 바쿠 시 외곽에는 원유를 뽑아내는 기계를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 카스피해와 맞붙어 있는 옛 시가지 이체리셰어(İçərişəhər)는 올드시티라 불리는데, 이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배경 속 서민들이 살고 있는 듯 꾸며져 있다. 12세기에 건설된 황토빛 성곽 안 옛 건물들에는 실제로 바쿠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마치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쓰이듯 카페, 식당, 호텔, 카펫 가게, 골동품 가게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다. 중장년층들이 거리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한가롭게 마작을 두고 있는 모습들은 마치 내가 과거의 중세시대 도시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리시아와 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고, 바쿠는 비단길(Silk Road)의 요충지로 번성한 무역항이었다. 바쿠 항구는 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는 통로로 이곳을 통해 동서양간 물품이 거래되었다. 바쿠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아제르바이잔을 오늘날에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러시아 문화를 많이 볼 수 있다).
뜨거운 태양이 계속되는 여름은 덥지만, 습기가 없었기에 그늘에 서있으면 시원하다. 따뜻하고 건조하며 긴 여름 날씨 덕에 풍부한 과일들이 즐비하다. 석류, 포도, 무화과, 산딸기, 복분자, 딸기 등을 저렴하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또한 터키와 비슷한 음식 문화가 있어 홍차와 견과류를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종교 또한 시아파 무슬림이라 자유분방한 시민들을 볼 수 있다.
분명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폴란드와는 또 다른 문화 충격이 찾아왔다. 정치, 문화, 분쟁, 환경문제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근무한 국제학교는 그동안 경험한 그 어느 학교보다 우수했고 매우 높은 수준의 직원 복지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고용된 교사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정신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사들이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주당 27시간 가르치는 시간과 13시간의 준비시간을 철저히 구분하였다. 또한 각 교사마다 보조교사를 붙여주고 교육에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학생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보장하는 학교였다. 매년 조국을 다녀올 수 있도록 가족 비행기 티켓이 나왔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도록 스트레스 없이 충분히 쉴 수 있게끔 배려하였다. 사택은 4인 가족의 경우 70-80평 정도로 넓은 공간이 제공되었으며, 출퇴근 버스, 자동차, 연료비까지도 지원되었다. 우리는 먹을 음식과 아이들 사교육 정도만 신경 쓰면 될 정도로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주말이나 휴가 때마다 시내의 호텔 리조트를 가거나 가까운 조지아나 터키 등으로 여행을 쉽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쿠에 간지 2년 만에 대출을 받아 뉴질랜드에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