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창준 Mar 23. 2023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안녕. 한 해가 죽고 나는 조금 더 낡았구나. 

곧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서른 세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주에 들었다는 외로울 고 자를 

차고 검은 창에 입김을 불어 써 볼 것이다. 

종소리와 폭죽은 

축하일까 위로일까 자위일까, 아님 협박일까.      

올 가을에는 

오래전 담임을 맡았던 아이가 죽었다. 

영어 성적 좀 올리라는 말에 

눈물을 쏟던 얼굴이 유난히 희고 

큐레이터가 꿈이었던 

눈동자가 새까만 아이였다. 

너는 늙어가는 대신 

죽음으로 어리고 서툰 조문객들에게 

짧았던 삶을 해설하는구나.      

이웃들의 불빛을 내려다 보며 

나는 한 잔의 와인을 들고 

다행히 살아 있고 

많은 죄는 짓지 않았다고 

안도해야 하나.      

너는 죄짓지 말아라, 

수염이 날 때를 기다리며 

조금씩 말이 없어지는 아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해야 하나. 

고마웠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단체문자를 전송하며 

선량한 밤을 보내야 하나.      

그리고 

이제는 덜 새로운 날들을 살아야 한다. 

지나온 한 해 동안 

너무 많은 장면에 밑줄을 그었구나. 

그 사이 새로운 표정과 

웃음을 배운 탓에 

평판이 조금은 나아졌다. 

갈피가 부족해. 

마스크를 쓴 홍콩의 밤은 

오늘 평화로울까, 

이 밤 기계 앞에 선 소년공은 없을까를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는 부끄럽게도 안온했다.      

가벼워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뜯어내며 

시간을 열 두달로, 삼백 육십 오일로 

절단한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죽어야 할 자들은 너무 오래 살았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폭죽의 소리가 바깥에서만 들린다.

이전 17화 무화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