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친구가 바로 나였다
엄마?
학교 끝났어?
응, 근데 너무 더워서 도서관에서 쉬었다가 가려고. 근데 엄마 입추 지났는데 왜 계속 더워? 엄마가 입추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인다고 하지 않았어?
입추 지나고 더위가 꺾이긴 꺾이는데, 그걸 한낮에 느끼기는 어렵고, 새벽에 느낄 수 있어. 새벽 공기는 서늘하거든. 내일 말복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그래? 한번 더 믿어보겠어.
그래. 어쩌면 절기가 사실은 현재가 아닌 앞으로 그럴 거라는 믿음 같은 것이기도 해. 입추는 저 멀리서 가을이 오고 있다. 말복은 이제 곧 더위가 끝날 거다. 그런 거야.
절기는 믿음이다? 그럴 듯 하네.
오늘 학교에서는 별일 없었어?
오늘말이야. 2학기 스포츠 정했거든.
스포츠? 그게 뭐야?
뭐 운동, 체육 활동과 관련된 동아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동아리인데 하나씩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그래도 학교에서 애들 움직이게 하려고 애를 많이 쓰네. 그래서 넌 뭘 하기로 했어?
난 방송댄스를 했는데 말이야.
방송댄스? 의왼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친구가 나한테 스포츠 같이 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는데, 이 친구가 축구는 힘들어서 안 된다, 배드민턴은 사람이 많아서 안 된다, 보드게임은 재미없어서 안 된다, 방송댄스는 노는 애들이 많아서 안 된다, 계속 단점만 얘기하면서 못 정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장 무난한 보드게임을 하자, 보드게임은 하기 싫으면 그냥 딴짓해도 되거든. 그런데 보드게임은 재미없어서 안된다고 그러고 그러는 동안 시간 다 가고, 다른 건 인원이 차고, 그래서 결국 자리 남는 방송댄스를 하게 된 거거든.
뭐, 방송댄스도 재미있겠네.
근데 방송댄스 정해놓고도 자꾸 걱정된다는 거야. 노는 애들 많다고.
에고, 걱정이 많은 친구네.
응, 걱정도 정도껏 해야지. 자꾸 그러니까 옆에서 듣는 나도 지치고, 다 받아주기가 힘들더라고. 이미 결정한거고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없는데.
그냥 따로 각자 원하는 거 하지 그랬어.
근데 또 같이 하기로 해놓고 중간에 나 안해, 그럴 수는 없어서 최대한 맞춰서 하려고 했지. 암튼 그거 때문에 진이 다 빠졌어. 근데 내가 그 친구를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었던 건 나도 그런 때가 있었거든. 소심하고 걱정 많고. 그런데 살아보니 걱정했던 일들이 다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고,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니란 걸 알게 됐거든. 그래서 걱정 안 하게 됐단 말이야. 정확히는 걱정 안 하고 그냥 해보는 쪽으로 노력한단 말이야. 자꾸 걱정하는 건 불안해서 그러는 건데, 그래서 내가 안심시키려고 노력해봤는데 안되더라고.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기 빨리고 정말 힘들거든. 엄마는 그런 친구 없었어?
음…글쎄…
뜨끔했다. 딸의 물음에 말을 얼버무린 이유는 딱 내 얘기하는 거 같아서다. 딸에게는 자제해서 그렇지, 사실 만만한 남편과 아빠에게 대책 없는 걱정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매사에 모든 경우의 수, 특히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서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대비하는 버릇이 있는데 매순간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피곤하다. 인생이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할 수도 없는데 모든 변수를 다 생각하려고 하고, 되는 이유보다 안 되는 이유를 크게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시도는 점점 어렵고, 갈팡질팡, 주저주저하다가 시간은 흐르고 집중력이 흐려지면서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엄마 간병하면서 걱정이 더 많아졌다. 매 순간이 걱정이다. 이렇게 무리하게 일으키다가 넘어지면 어쩌지, 잘못 잡았다가 주저앉으면 어쩌지, 루틴이 깨져서 어쩌지, 밥을 못 먹으면 어쩌지, 병원에 갔다가 괜히 더 안 좋아지면 어쩌지…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고 하루종일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딸의 말은 뜨끔했고, 나를 돌아보게 했다. 딸의 말처럼 걱정하는 많은 일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고, 미리 걱정한다고 해도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미리하기보다는 좀 더 단순하게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승이 따로 없다. 딸이 나를 깨우치게 하는 스승이고 나를 고치는 의사고 내 옆에 있어주는 친구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