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길로 가지 않는다
엄마, 나 이 책 읽으려고 가져왔어.
하며 딸 홍시가 나에게 오면서 읽겠다고 가져온 책이 하필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처음에 스쳤던 생각은 19금?스러운 이야기인데 괜찮을까? 였다. 읽은 지 꽤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소위 자유롭고 개방적인 생활, 꽤 노골적인 성적 묘사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읽지 말라고 한다고 안 읽을까? 더 읽고 싶겠지. 숨어서 읽을 뿐. 그런 이유로 수위가 걱정되어도 웬만하면 금지를 하지 않는 쪽을 택해왔다. 그래도 중3인 딸에게 굳이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왜 그 책을 골랐어?
제목이 끌리고 책이 예쁘고 가볍더라고. 참, 이거 영화로 나오는 거 알아?
그래? 몰랐어.
김고은이 재희로 나온대.
재희는 이 책에서 유일한 여자고, 책 전체는 게이가 중심인 퀴어 이야기다. 나는 재미있게 읽었고, 이 책을 독서모임을 한 적도 있었는데 반 정도가 불편함을 보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책의 내용을 떠올리려 기억을 훑는 사이, 홍시는 이미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홍시가 내 책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사실 내가 의도했다. 커가면서 홍시와 내가 읽은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나는 어린이 책과 어른책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선상에 꽂아 두었다. 나름 전략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홍시는 각종 신화를 좋아하는데, 어린이용 신화 이야기 옆에 신화 관련 책을 꽂아두면 서서히 넘어오겠지, 라는 가설도 세웠다. 하지만 가설은 틀렸다. 자연스럽게 내 책으로 넘어온 것은 맞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대로, 내가 준비해놓은 길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훅 들어왔다. 어느 날은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제목들이 즐비한 고전 쪽을 기웃거리다가 ‘인간실격’과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고 했고, 한동안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산둥수용소’가 있는 수용소 문학을 기웃거리는 거 같더니 방학을 맞아 ‘삼국지’에 푹 빠져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3권이 사라져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책이 모여진 곳에 표류하였다가 ‘대도시의 사랑법’을 만난 것이다. 연작소설이고, 술술 가볍게 읽히는 문장이니까 홍시의 속도라면 두어 시간이면 끝날 책이다. 홍시는 내리 세 편을 읽고 잠시 쉬려고 책을 덮었다.
어때? 재미있어?
글쎄...그냥 짠한 사랑 이야기,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네, 뭐.
그렇구나. 홍시에게는 퀴어 이야기가 아닌 그냥 사랑이야기, 사랑이야기라기보다 외로운 인간 이야기일 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