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의 조건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김장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김장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일단 아빠가 텃밭에서 김장 농사를 지어 배추, 무, 쪽파, 갓이 있다. 신선 재료 이미 준비 완료. 우리 가족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하나같이 김치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은 모두 엄마의 맛있는 솜씨 탓이다. 김치 없는 밥상을 생각하니 아득하고, 지금처럼 김치를 양껏 사 먹는다면 우리 가정 경제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짜고 달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심심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 맞는 김치를 찾는 일은 김장을 하는 것만큼이나 고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 결심했어. 하자.
이제는 몇 포기나 해야 할지 고민이다. 아빠가 농사지은 것은 60 포기, 작년에도 60 포기를 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줄여서 50 포기만 하기로 했다. 남는 10 포기는 필요한 사람에게 줬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그마저도 자신이 없어져서 다시 10 포기 삭감, 40 포기만 하기로 했다. 또 남게 된 10 포기는 친구에게 줬다. 결과적으로 욕심내지 않고 줄여서 한 건 잘 한 일이었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을 때 김장은 엄마, 아빠 둘이서 알아서 했다. 우리가 신경 쓸까봐 다 끝내놓고 연락했다. 나는 택배로 결과물만 낼름 받아만 먹고, 과정에 대해선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엄마가 쓰러지고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된 이후 이제 그럴 수 없게 됐다. 엄마 대신 나는 물론 아들, 사위 다 달라붙어서 했다. 엄마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노동의 정도는 추상적일 뿐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엄마의 노동이 최소 성인 3인분이라는 것을. 너무 뒤늦은 후회지만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의 손이 왜 이 모양인지 이제 알았다.
내가 김장을 해본 결과 김장의 조건이 있다. 김장을 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면 안 하는 게 맞다. 망설임 따윈 없이 김장은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도 힘든 절대 노동량과 강도 때문이다. 허리 끊어지고 팔다리 쑤신다. 그리고 김장을 혼자 해야 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여럿이 달라붙어서 해도 힘든 게 김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필요성을 절감하여 만장일치로 마음을 모으는 게 1번 조건, 누구 한두 명의 헌신이 아닌 가족 구성원의 적절한 역할과 비용 분담이 2번, 아웃소싱(절임배추, 손질된 재료)과 가내수공업을 적절하게 믹스하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가족의 작은 축제가 될 수 있다.
오랜기간 우리를 먹여 살린 엄마의 참여 없이 우리끼리 처음하는 김장이라 힘들긴 힘들었다. 노동의 강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매우 컸다. 그러니 끝나고 밀려오는 감정은 과정의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김장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데서 오는 성취감, 가족들의 협동과 연대에서 오는 안정감, 1년 먹을거리를 준비했다는 든든함과 충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쉬운 것은 엄마가 건강할 때 그렇게 못했다는 점이고, 엄마에게 생색내고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여기에 남겨본다.
엄마, 우리 김장했어. 잘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