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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나의 힘. 하지만 망각을 위해서는

by 휴지기

오늘 아침 급하게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정리했다. 2살, 4살 딸이 있는 남편 친구가 오전에 장난감을 물려받으러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 친구에게 줄 것과 남겨야 할 것들, 이제는 그만 버려야 할 것들을 분류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애한테 장난감을 엄청 많이 사줬었네."

"응, 그래 좀 과했었어."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시간은 많고 아빠는 없고, 뭐라도 하면서 애랑 시간을 보내야 할 것 아냐? 그래서 장난감이라도 사준 거야. 장난감 사러 가면서 시간 보내고 장난감 고르면서 시간 보내고 장난감 사준 거 가지고 놀면서 또 시간 보내라구."

"다 내 탓이지?"

"응, 당연하지."


남편은 개구진 남자 초등학생처럼 이소룡 발차기를 하면서 내 원망을 튕겨냈고, 나는 유치한 남편의 장난에 꺼지라고 응대했다.


며칠 전 밤이었다. 9시가 넘어 들어온 남편은 맥주와 피자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저녁도 먹었는데 무슨 피자냐고 툴툴거리면서 나는 상을 펴고 있었다. 남편이 나에게 '자기야 이것 좀 갖다 놔줘.'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11살 아들이 말했다.


"어? 아빠는 엄마한테 자기라고 하는데 왜 엄마는 아빠한테 새끼라고 해?"


나는 뜨끔한 마음이 들어 '엄마가 언제 그랬어?'라고 말하고 눙치고 넘어가려고 그냥 웃었고,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어, 원래 엄마는 아빠한테 욕 잘해. 엄마한테 욕먹어도 아빠는 항상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하잖아. 그게 엄마 아빠의 애정 표현이야."

"맞아. 엄마가 아빠 사랑해서 그런 거야."


나는 남편의 말을 받아 재빨리 대답했고, 아이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 가족은 좀 특이해. 그리고 애정 표현도 너무 과해.'하고 말하고 말았다.


망각은 나의 힘, 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망각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뒤끝이 없다.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들이 있었던 사이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의 감정을 토해내야 한다.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 감정을 확, 토해내야지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아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남편과 살면서 남편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고 죽을 만큼 서러웠으며 말할 수 없이, 외로웠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남편에게 쏟아붓기도 했고, 남편이 없을 때는 언제나 내 옆에 있던 아들에게,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욕이 나오는 순간엔 욕을 했고 남편을 원망하고 싶은 순간엔 원망을 했다.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이 말을 뱉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마음에 생채기가 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했다. 나는 나 편하자고 아이를 희생시켰는지 모른다.


그런 감정들을 토해내지 않으면 내 몸이 꼭 분노와 슬픔으로 빵 터져버릴 만큼 그때는 언제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라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내 옆에 있는 이 아이는 내가 온 우주라는 것을, 내가 남편을 욕하면 이 아이는 마음속에서는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반쪽인 아빠가 허물어져간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엄마마저도 허물어져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주 잊었다.


아이는 어른들의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은가보다. 별의별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 내 입에서 내뱉어진 말, 아이가 듣고 그냥 흘려버렸으면 좋을 말을 아이는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가끔 아이가


"엄마, 아빠처럼 살지 말라면서?"라든지 "엄마가 아빠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면 마음이 또 뜨끔해진다. 아이가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어서 그러는 건지 이런 말들을 심지어 남편이 있는 앞에서 하면 나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런 말들을 들은 남편은 아들에게 말한다.


"괜찮아. 엄마는 원래 아빠를 자주 구박하잖아."


그러고 나서 나한테도 말한다.


"자기가 이런 말 하니까 애가 다 듣고 기억하잖아. 그래도, 졸라 사랑해."


그러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을 춘다. 아우, 또라이.


나는,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담을 수 없는 거친 극한의 말들을 하면서 내 안의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하면 안 되었다. 아이 앞에서는, 남편이 아이 아빠로서는 슈퍼맨은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존재하도록 했어야 했다.


여린 마음에 나의 말들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을지도, 아이도 모르는 사이 흉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혹시나, 남편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남편은 나에게 못할 행동들을 하고 나는 남편에게 못할 말들을 했다. 그때는, 남편의 행동에 비하면 나의 말들은 너무 미약한 것 같아 더 큰 상처, 더 큰 충격을 줄 말들을 골라 골라 남편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나의 말들이 너무 강한 둔기가, 너무 예리한 칼날이 되어 아직도 남편의 몸 어딘가에 박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어젯밤에 남편이 '내일 아침에 미역국을 끓어줄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집에는 미역도, 국거리용 소고기도 없다. 미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설치다니.


참으로 모자란, 이상하고 웃긴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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