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였다. 아무리 물을 길어와 부어도 항아리 속에는 물이 차지 못했다. 빠진 밑으로 내가 공들여 길어 온 물들이 금세 빠져나갔다. 우물은 멀고 물을 채운 양동이는 무거웠다. 발뒤꿈치가 까지고 어깨가 굽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입술이 부르텄다. 나는 점점 더, 볼품없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3월은 가장 바쁜 달이다. 3월 내내, 아직도 3월이냐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피곤했고, 내 신체 중 가장 예민한 성대가 몸의 피곤함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해야 했다.
억지로 목소리를 낼 때마다 성대가 아니라 뇌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피곤했다. 몸에 남아있는 작은 에너지를 소리를 내는 데 다 써 버리고 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이 직업은, 목이 약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을 지냈다.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내 피곤함의 대가, 내 노동의 대가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카드값과 대출금, 자동차 할부금, 대출 이자... 들이 빠져나가버려 마이너스 통장의 한도가 꽉 차버렸다. 그런데 아직도 내지 못한 많은 대출금 이자가 남아있다. 자꾸 카드값이 연체되었다고, 잔액이 부족해 대출금이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전화와 문자, 카톡이 온다.
나에게 사업 자금을 대 달라고 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었다.
"들어올 돈이 있어. 시기가 안 맞을 뿐이야. 이거 못 막으면 우리는 완전 망해. 바로 돌려줄게. 이자까지 잔뜩 쳐서 돌려줄게. 이번만 도와주라."
나는 남편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이 돈을 못 막으면 우리 집이 망한다는데,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해줄 수 있을 때마다 돈을 해줬다. 물론 나는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았고, 지금은 그걸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 달에 내가 갚아나가야 할, 남편 때문에 받은 대출금과 그 이자가 딱 내 월급만큼이다. 나는 결국, 남편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데 내 인생 전부를 허비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면 부아가 나서,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잘 잊어버린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잊지 않고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면 억울함과 원망이 나를 잡아먹어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잊어버리니, 그나마 그럭저럭 살아졌다. 그리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는 그 연체 문자와 전화에 크게 놀라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대출금 이자가 미납되었다는 문자 하나에 벌벌 떨고 내 인생이 그 문자 하나로 망한 것 같았는데 하도 자주 그런 연락을 받다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물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힘들다. 가끔은 죽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빈번하다. 그냥, 내게 닥친 불행에 어느 정도는 무뎌진 것 같다.
수시로 연체 연락을 받으면서도 남편이 만들어준 무생채와 미나리무침에 참기름과 들깨를 넣어 밥을 비벼먹고 있으면,
'그래, 연체 뭐, 언젠가는 갚아지겠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남편도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이 불행도 옅어지고 편안함이 찾아올 때가 있겠지'
하고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지금 남편은 일을 하러 경기도에 올라가 있다. 800톤인가 하는 크레인이 작동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어야한댔나 그래서 너무 무섭다고 했다.
나도 무섭다. 남편이 일을 하면서 다치는 것도 무섭고 우리의 연체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지 그 끝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도 무섭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잊는다. 잊고, 남편이 경기도에 올라가기 전 만들어놓은 밑반찬들을 먹으며 억지로라도 기대한다. 아직 오지 않은 '언젠가는'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