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거제도 횡단 도보
이 글은 도보명상(徒步冥想) 1 - 고행과 도보에 이어 나머지 진해에서 부산 영도까지의 일정에 해당한다.
나는 8월 초에 진도에서 부산 영도까지 걷기 동호회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목포에서 이미 9일간 진도에서 통영까지 240km를 걸어왔다. 거제도 32km, 진해에서 을숙도 32km, 을숙도에서 남항대교, 마지막 날 오전 영도까지 12km가 남아있다. 나는 소백산 단양에서 문인들과 헤어져 낮 12시 30분에 출발해서 거제 숙소까지 시외버스 3번, 택시 1번, 시내버스 1번 타고 물어물어 밤 9시 30분에야 도착해 혈혈단신으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들을 만났다.
33도. 무더위가 아스팔트 길가를 끓게 하고 있다. 일행 중 중학생, 초등학생도 있다. 잘도 걷는다. 물어보니 초등생 2명은 남매인데 처음 일주일간은 힘들어하며 집에 가자고 엄마에게 졸랐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들 칭찬과 격려의 힘과 관심이 그들 남매를 일주일 만에 만만치 않은 길꾼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초등생 2학년과 4학년 아이들이 350여 km를 걷다니!
장기도보에는 재미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동식 빨래 풍경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씻고, 먹고, 잠자고 아침에 출발해야 하니 빨래가 마를 새가 없다. 그래서 배낭에 마르지 않은 옷을 옷걸이에 걸고 걷는다. 여러 명이 그러고 다니니 그것도 작은 장관에 해당한다.
8월 초 33도, 34도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녹인다. 고행(苦行)이다. 그러나 고행의 길 속에도 진리는 흐를 것이다.
“그대는 항상 진아(眞我)이며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것은 진아뿐이다. 진아에는 나라는 생각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신(神)인 진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한 자가 가장 뛰어난 수행자이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진아 속에 계속 머무르며 진아와의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문제도 모두 신에게 맡긴다면 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다 맡아준다.”
- 라마나 마하리쉬
나는 영성계발의 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몇 분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그중 한 분이 라마나 마하리쉬이다. 침묵의 성자, 눈으로 말하는 성자, 그의 진리는 단순, 분명하다. 명쾌하기까지 하다. 그의 진리는 근원의 핵심을 찌른다.
"이 세상은 근본적(根本的)인 본성(本性)만 존재한다."
이 말은 '그대는 항상 진아(眞我)이며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근원을 꿰고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나는 그 말을 돼 뇌이며 이 길을 간다. 베다철학에 바탕을 두고 샹카라의 불이일원론을 계승하는 그의 사상은 나의 진리탐구 노정에도 도움을 주었다.
나도 너도 저 끓어오르는 아스팔트길도 이 우주도 존재하는 것은 근본적인 본성들뿐일 것이니, 이 화두를 가지고 어느 불타는 길인들 못 가랴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살다 보면 고난, 고통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인생이 그렇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근본적인 본성만 존재한다는 진리의 핵심을 품고 가면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 그 속에는 부정적인 내용이나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철저한 긍정의 일원론이다.
진리는 그 속에 에너지를 품고 있다. 고난과 고행 속에도 본성은 존재한다.
나도, 너도, 저들도, 만물과 우주도, 모두 근본적인 본성의 다른 모습들일뿐이다. 한여름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가는 80여 명의 대군들도 모두 근본적인 본성의 다른 모습들인 것인가.
거제도 1박 이후 논길을 따라 바다 건너 진해로 가는 길이 보인다. 길가 초록의 논 풍경이 와이드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문득 뭉클한 무엇인가가 내 가슴속으로 기어든다. 이건 뭔가.
땅을 밟아본다는 거. 푸른 생명들 가득한 땅과 스킨십을 한다는 거. 이 땅과 저 푸른 생명체들, 물, 바다, 하늘 구름, 바람, 비 - 이것이 모두 근본적인 본성에서 나온 형상들이다.
자연은 책이다. 그 책을 펼쳐 본성끼리 함께 걷자고 말해본다. 문득 나는 없고 본성만 걷는 것인가.
을숙도를 지난다. 을숙도는 큰누님이 부산에 살아 중·고등학교 때 몇 번 와본 기억이 있다. 을숙도에 가득했던 갈대숲은 거의 베어지고 개간된 모습이 아쉽다. 갈대숲 사이로 보였던 게 들의 장관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남항대교에서 큰 비와 바람을 만났다. 남항대교를 건너기 전 근처 교각 밑에서 식사를 하고 다리를 건널 채비를 한다. 에너지 입력보다 출력이 크니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써도 몸속으로 비가 들이쳤다.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다리를 건넌다. 우산이 벗겨지고 앞이 안 보일 정도여도 이들은 전방과 후미까지 단련된 전사들 같다. 13박의 강행군 일정으로 조련되어 어지간한 어려움은 문제없을 것 같다. 오히려 사진을 찍으며 폭풍울 즐기기도 한다. 맑고 잔잔한 날씨에 건넜다면 어찌 폭풍 속의 모습들이 사진에 찍혔을까.
영도 - 종착지가 보인다. 일정을 끝내고 단체사진을 찍고 환호하고 손뼉 치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일행 중에는 암에 걸린 이와 함께한 가족도 있었다. 내가 모르는 갖가지 사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초등생 2, 4학년생들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끝이 보이면 고생과 정은 더 정비례하는 것 같다.
나의 첫 도보명상 일정도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