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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명상(徒步冥想) 4 - 비 안 와도 갑니다

사진 : 한강빗속도보

by 전영칠

코스 : 구일역 안양천 - 선유도 - 양화대교 - 마포대교 - 공덕동로터리 한강빗속도보

거리 : 18km



│빗속명상│


도보 1년쯤 후 내가 깃발(도보리더)이 되어 첫 도보 행렬을 이끌었다. 맑은 날이 아닌 비 오는 날로 골라 가는 빗속도보를 카페 도보안내 게시판에 걸었다.

비가 오면 집중이 잘 된다. 개인적인 성향이긴 하지만 뭐 어떠랴 싶어 비 오는 날만 골라 도보를 시작하였다. 4명과 함께 구일역 안양천으로 향했다.

종일 비라 했다.

그 비를 걷는다. 폭우나 소나기도 아닌 추적추적 이어지는 비.

비는 하늘과 지상을 종으로 이어준다. 비가 우주를 통일시켜주기라도 하려는가.

내가 기실 비를 좋아하는 것은 내리는 비가 우주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합해주는 것 같아서다. 비는 내리며 종으로 그들 - 우주, 인간, 자연을 실에 꿴 바늘처럼 하나로 기워준다. 그 비를 맞으며 일부러 천인지의 합일을 감사한다.

몇 가지의 비료보다도 이렇게 푸근하게 내리는 비가 작물의 성장과 건강함의 정도에 지대한 영양을 준다는 것을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농촌의 곡식들에게는 이런 비가 어떤 비료보다도 나은 법이다. 나는 농촌에서 한 때 농장을 가꾸었었다. 주경야독하던 시절이었다. 도시를 떠나 살던 시골 생활, 그리고 지금은 다시 시간에 쫓겨 사는 도시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비를 보며 걷는 길이 싱싱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그럴까?


도보명상을 하며 구름 같은 생각들을 바라본다.

생각들과의 전쟁은 없다.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관찰할 뿐이다.


'나'는 늘 항복한다.


그 많은 구름 같은 생각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고로 존재한다.



부조리 철학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담배 문 얼굴에는 고뇌가 묻어 있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무겁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고뇌에 차고 무겁다. 인류의 실존을 한 짐 지고서 앉아 있다.

서양의 실존이 다소 그렇다.

반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실존은 가볍다. 깃털 같다. 비워져 있는 상태이니 얼마나 홀가분할까.


우산을 들고 비 오는 안양천을 걷는다. 다행히 - 이 역시 내 개인 성향이다 - 맑은 날이 아니라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 없을 때 걷는 이 길이 좋다.



│머리에 꽃 꽂은 어느 여인 이야기│


오늘 같은 비가 연상되는 내가 어릴 때 이야기 한토막을 소개한다.

우리가 살던 은행동 동내 근처에 결혼도 하지 않은 어느 젊은 처녀가 있었다. 사랑하던 남자와 8년 동안을 만나고 직장 다니며 사법시험 공부하는 남자를 뒷바라지했단다. 결혼 약속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남자와 헤어졌다. 합격 후 서울로 가고 그게 끝이라 했다. 수군대는 동네 어른들 사이로 나는 거기까지 귀동냥으로 들었었다. 이른바 막장드라마였다.

그녀는 화장을 곱게 하고 옷도 그럴싸하게 차려입었고 또한 하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입술에 묻은 붉은 루주색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당시 우리 집은 대전 시내에서 레코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정문 입구 좌우에 스피커가 놓여 있고 문 닫을 때까지 음악을 틀어 놓는다. 그녀는 가게 앞에서 허공을 향해 물도 들어 있지 않은 고무 물총을 연신 쏘아대었다.

그녀는 오가는 행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얼거림은 없었으나 이따금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듯 한 표정이었다. 어떤 때는 무표정했다.

지금이야 종로 거리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 의해 119에 신고라도 해서 <상황 끝> 일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은 종종 오고 가는 행인들의 수군거림, 미친년 운운하며 비웃는 중고등학교 아이들, 쯧쯧 어쩌다가 혀를 차는 아낙네 같은 이들이 대수였다.

그녀는 그렇게 낮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저물녘에 정신이 들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을 훔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었다. 나는 그녀를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뒤 따라가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우리 가게 앞에서 서성거렸다.


일주일쯤째 되는 날, 비가 하루 종일 오는 날이었는데 그녀는 우산을 쓴 채로 한참을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정신이 들어 이사 갔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소문만 무성하지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것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그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다만 그 일은 '아, 사랑이 잘 못되면 저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라고 내 뇌리에 각인되어 기억으로 깊숙이 남겨졌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래된 이야기이니 살아 있다면 편안하심을, 저 하늘에 계신다면 명복을 잠시 빌어 본다.



│떨어지는 빗방울 관찰하기│


자전거 길로 자전거 두어 대가 지나간다. 비옷을 입었으나 별 소용이 없을 듯하다.

걷기 좋게 비가 내리고 있다. 가끔씩 길이 낮아 비가 몰리는 곳이 있다. 나는 그것도 즐긴다.

안양천을 지나 한강 합류지점을 지난다.

한강은 자주 보지만 거대하다. 평균 폭이 1.2km에 거대한 둔치와 넓은 한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폭이 더욱 커 보인다.

선유도는 작으나 예쁘다. 비 맞은 꽃들이 함초롬히 초롱초롱하다. 메타세쿼이아 길 벤치에 걸터앉아 커피와 간식을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비는 폭우나 폭풍우 같은 비가 아니라 몇 시간씩 가늘게 내리는 비다. 다행히 그런 비가 도보행인들을 맞추어 준다.


'비 안 와도 갑니다'라는 첫 깃발 도보제목이 재미있었나 보다. 댓글에 그런 글들이 보인다. 동행한다고 했던 한 사람은 아무래도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못 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저 빗물들처럼 자연스럽게 인연 되는대로 함께 흘러가면 될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도시는 인도네시아의 머라우케라고 한다. 평균 강수량은 11,770mm로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며 세계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영국은 연간 강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비가 자주 오는 날이 많아 유명하다. 영국의 비는 대체로 가벼운 비가 자주 내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비가 오는 날씨는 영국 문화의 일부가 되어 문학과 예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조지오웰···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적당히, 자주 내리는 비는 문인들에게도 정서적 영감을 선물한다.


걸으면서 비를 바라본다. 근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행복으로 향하는 기술 같은 것이다.

이처럼 가늘게 비가 오는 날이면 곧 잘 산으로 명상을 하러 가곤 한다. 두 소나무 사이로 판초를 걸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그렇게 마음을 객관화시키는 근육을 키운다.


선유도 중간쯤에서 양화대교로 접어든다. 양화대교 북단에서 마포대교로 올라가 목적지 공덕동로터리로 향한다. 이번 길 코스는 이기자기 하고 예쁜 길이다.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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