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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명상(徒步冥想) 3 - 상처치유

사진 : 비 오는 날의 한강

by 전영칠


코스 : 상암월드컵경기장 - 성산대교 북단 - 한강대교 북단 - 잠수교 도강- 한남대교 남단 - 잠실철교 도강- 광진교 도강 - 성내천 - 올림픽공원 일주- 올림픽공원 정문(평화의 문) -몽촌토성

(오후 6시 30분~ 익일 오전 5시 00분)

거리 : 36KM




│새벽 3시 한강의 고요│


명상을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다.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각종 상처는 비유컨대 컴퓨터의 버그에 해당한다. 컴퓨터의 버그는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듯, 상처라는 버그는 나와 순수의식과의 연결 스위치를 OFF 상태로 만든다.


대한민국은 주말이면 서울 경기권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명·무명산에 천만이 넘는 등산인으로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가 되어 있다. 등산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등산에 이어 두 번째로 도보 열풍이 불었다.

오후 6시 상암월드컵에 한강무박도보를 위해 수십 명의 도보동호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오전 1시를 지나 2시, 3시의 한강 풍경은 어떠한지 나 역시 궁금하다. 늘 다니던 곳이나 오전 2~ 3시의 한강은 생소하다.

오늘의 도보코스는 상암월드컵을 기점으로 잠수교, 잠실철교, 광진교 등 한강다리 3개를 건너 올림픽공원을 지나 몽촌토성을 한 바퀴 돌고 새벽 해장국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늘 보던 강. 이 강은 우리들 역사와 함께 살아왔다 ··· 동족의 아픔 6.25로, 민주주의의 함성 4.19로, 혁명의 5.16으로, 이념의 80년대와 88 올림픽의 북소리와 2002 붉은 물결의 월드컵을 함께 하며 우리들 곁을 지켰다. 먹고살기 위해 자가용으로, 지하철로, 버스로 건너 다니기 바빴던 강, 한강. 그 강을 걸어서 건너본다.

방문한다는 것과 지나친다는 것은 사실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일상을 살며 스피드라는 마력에 쫓겨 슬쩍슬쩍 지나쳐 버리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걷는다. 걸어서 땅과 한강을 만난다.

몇 명의 도우미들이 36킬로 세 곳에서 밤참 및 간식을 준비한다. 한강철교를 지나 코스모스 길이 나온다. 어두워진 한강변 흙길 좌우로 붉은색, 분홍색, 하얀색 코스모스가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수교에서 뿜는 물기둥과 파란 불빛이 환상적이다. 밤 8시 40분경의 잠수교 주변은 생동감이 있다. 연인들은 찬란한 풍경을 사진에 담기 바쁘다.



│상처라는 낯선 친구│


그 불빛들의 향연을 보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처’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쌓이고 쌓인 상처는 우울증, 공황장애 등 마음의 병을 부른다. 스트레스와 상처로 인해 마음이 담고 있는 불행을 뇌는 그대로 저장한다. 뇌는 거짓을 모른다. 저장된 불행들은 그대로 '내일 이후' 불행으로 행해진다.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마음의 행태대로 불행은 불행으로, 행복은 행복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일단은 내 마음이 행복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상처 치유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다.


세상에 상처 없는 자 있을까. 단지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일 뿐이다. 기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80억 인류가 거의 상처투성이다. 나 돈 많은 데, 나 미남인데, 나 대장이고 장관인데··· 이렇게 잘나고 멋있어 보여도 기실 한 두 꺼풀만 벗기면 숨겨놓고 있던 상처가 슬쩍슬쩍 보인다.

국가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을 보자. 겉으로 평온해 보여도 지붕을 벗겨 보면 '소쩍새 우는 사연'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다. 학교는 어떤가. 직장은 어떤가. 군대는 또 어떤가. 사회 도처가 스트레스의 클레이모어 지뢰 투성이다. 거기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버그 범벅이다. 순수의식의 행복감이 올 수가 없다.


상처받은 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또는 스스로가 불리하거나 남이 불편해할 것 같아 숨기고 살고, 때로는 아프니까 남에게 상처 주고 산다. 그런 상처투성이 인간들이 할퀸 자국 때문에 그들을 태우고 돌고 있는 지구도 상처투성이다. 한강은 그 상처가 유독 많은 곳이다. 현실에 숨차하다가 그 벽을 넘지 못해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한다. 그 수가 적지 않다. 아, 우리는 상처투성이 세상에 살고 있다.

지렁이에 소금을 뿌리면(어렸을 때 동네에서 내 또래 친구들은 그렇게 놀기도 했었다) 마구 꿈틀대다가 쭉 뻗는다. 그리고 녹기 시작한다.


상처는 아프다. 아픈 만큼 겉으로나 속으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상처 있는 자에게 매를 드는 것, 혹은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부질없다. 상처를 싸매주거나 그럴 수 없으면 차라리 침묵하거나 기다려주는 것이 낫다. 상처 있는 자는 무엇이 남을까. 지렁이처럼 소리 없이 포효하다가 마침내 녹기 시작할까. 차라리 외마디 비명하나 내지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지렁이처럼 녹아 존재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내지를 수밖에 없는 지렁이의 비명은 소리를 내질러 아픔을 호소하는 자보다 더욱 아리고 슬프다.

그러나 말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자는 상처가 깊은 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 마치 골이 깊은 산이 아름다운 것처럼.


낮과는 전혀 다른 고요한 한강을 유유자적하게 걷는다. 잠수교를 건너 성수대교 방향으로 돈다. 넓은 공원이 나온다. 반포, 강남인들이 주말이면 많이 찾는 곳. 이곳 역시 인적이 끊어졌다. 출발할 때 수십 명이었던 우리 일행도 흩어져 서너 명씩 한가로운 밤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을 걸으며 상처치유 명상을 한다.


새벽 3시의 한강은 교요하다



│치유명상│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에 집중' 한다. 6번 한다.

숨을 들이쉴 때 '평안이 나에게 들어온다'라고 생각하고, 내쉴 때 "상처가 나를 떠난다"라고 상상한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감고 '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머리끝 백회 아래로 들어온다, 그리고 천천히 온몸을 감싸고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 빛은 어머니 같은 사랑과 약손과 치유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빛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퍼지며 상처를 감싼다.

- 그만하면 되었어. 너는 너로 충분해. 잘 참고 잘 살았어.

나는 걸으며 양팔로 나를 안아준다.

-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거 알아.

스스로 두드리며 위로해 준다.

- 괜-찬-아. 괜-찬-아.

눈물이 맺힌다.

- 힘들었던 만큼 행복함도 많을 거야, 틀림없이!

나는 그것을 믿는다. 암.



│에필로그│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좋다. 어쩔 수 없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명의는 많다. 그러나 최후의 명의는 자기 자신이다. -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는 치유된 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담 하나 - 나는 수십 년 도(道)의 길을 걷는 중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상처를 3번 치러 보았다. 한참 후, 그 3번의 상처가 내 전생과 현생의 업을 치르기 위한 대가였음을 알고 난 후에야, 그 상처는 저절로 숙어졌다. 그 경험 덕분으로 그 이후 어떤 어려움이 와도 마음의 저 깊은 속에서는 '어떤 편안함'이 자리 잡히게 되었다. '나'라는 에고를 포기하는 것이 그만큼 쉬워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늘은 상처를 통해서도 도를 닦게 하신다.



한강은 낮이라는 냉엄한 생존경쟁의 얼굴과 밤이라는 여유로운 치유의 두 얼굴을 지녔다. 잠실철교를 건너기 전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밤참을 준비하고 있는 세 명의 도우미들이 보인다. 도보동호회는 다음 카페를 통해 취미를 나누는 순수 비영리 모임이다. 이들은 이미 한강 무박도보를 경험한 분들이다. 후배들을 위해 봉사대원을 자처하고 있다. 서로서로 도우며 경험을 나눈다.

한강도보는 36km로 끝나지 않는다. 50, 100, 200km까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하는 코스가 있다. 50km는 12시간 내로, 100km는 24시간 내로, 200km는 48시간 내로 가양대교, 왕숙천, 팔당대교 등의 한강을 돌고 또 돈다.

이렇게 한강도보는 도보인들에게 남모르는 도보문화로서의 활용도를 보인다. 도전하는 자들에게 도우미는 꼭 필요한 존재다. 서로서로 기브 엔 테이크 하는 것이다.


잠실철교를 건너 다시 한강북단으로, 또다시 광진대교를 건너 한강 남단으로 드디어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날개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찍고 몽촌토성에 도착하면 새벽 어스름이다. 마저 몽촌토성을 한 바퀴 돌고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뻐근한 다리가 오히려 흐뭇하다.

상처치유와 도보명상, 그리고 마음 평안함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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