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백석산 임도
새벽 6시부터 서울에서 눈이 내렸다. 마치 종말처럼 내렸다.
폭설이었다.
지난겨울의 끝,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신리. 오전 10시, 도보꾼들을 태운 버스가 정거장에 섰다.
신리 임도 바닥에 소복이 쌓인 눈 위로도 서울의 새벽하늘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버스기사를 놓아두고 일행은 백석산 24km 임도(林道) 길에 올랐다.
대학생 시절, 언젠가 혼자서 길을 걷다가 도시의 오래된 브로크 담벼락에 쌓이는 눈을 보고 한참을 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뇌가 알파파장 상태로 떨어지고 있었을까. 나는 알 수 없는 고요 속에서 차분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었다. 명상이 무엇인지도 들어보지 못한 20대 시절, 그 자리에서 1시간 여를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역시 대학생 시절 부산에서 지금은 이름이 없어진 묵호까지 동해안 일주를 한 때가 있었다. 걷다가 지루하면 버스를 타고, 경치가 좋으면 다시 걷고 그러다가 지루하면 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 도보반, 버스반의 여행이었다. 동해안 가를 따라 걷다가 초소에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10여 차례 검문을 당하고는 했다.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었다.
묵호에 도착해 미리 서 있는 완행열차를 탔는데 기차는 20분 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내가 탄 한 동 전체가 아무도 없었다. 밤, 차창에 비가 사선을 그으면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빗물을 바라보며 역시 몽롱하면서도 황홀한 상태에서 20여분의 시간을 보냈다.
겨울, 인천 송도해수욕장에서 저녁을 먹으러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없고 난로 위 큰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는 난로 옆 의자에 앉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끓고 있는 주전자 위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20여분 그 상태였을까. 그리고 역시 고요한 평화가 왔다.
위 세 가지는 20대 후반에 느꼈던 경험이었다. 공통적인 것은 혼자였고, 주위에 방해받는 요소가 없었고, 10분에서 20분 이상의 정적인 상태가 유지되었었다는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그 순간들이 무척이나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요즘은 비가 오면 일부러 명상을 하러 산에 간다. 소나무 사이에 빗물방지 판초를 두르고 그 아래 앉아 도르르 구르다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 맛이 좋다.
나는 이 상태의 명상을 자연명상(自然冥想)이라 부르고 싶다.
혼자서, 비나 눈이 올 때, 맑은 날 바람이 초록의 나뭇잎을 가볍게 흔들 때 등 그중 '한 상태에만 관찰'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생각들은 나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빠진다. 그것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다시 한 상태만 의식한다. '알아차림'으로 파악만 하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잠두 백석산을 걷는다.
침묵으로 걷고 있는 두 발에만 몰두한다.
왼발 다음으로 오른발, 오른발 다음으로 왼발,
사람들의 뒤태가 보인다.
말없이 걷는다.
사람들은 온전히 뒤태를 내어 준다.
모르는 채 걷고 모르는 채로 눈이 내린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이 참 좋다.
평이하게, 제도도 없이, 계급도 없이 그저 눈이 내린다.
모두들 영화배우 쟝가방 같다.
뒤태로 연기하는 명배우.
그런 것들이 왼발 음에 오른발, 오른발 다음에 왼발 '알아차림'의 명상을 돕는다.
우산 사이로 보이는 가늘고 하얀 그 무엇.
순결은 아무것도 묻히지 않아 하양과 통한다.
뒤태를 본다.
일행은 그대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그대가 지닌 직책이 무엇인지 알 필요 없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모르는 채 걷고 모르는 채로 산다.
가르치지도 않고 가리키지도 않는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집중을 위해 자연스럽게 그리한다.
명상은 끊임없는 '알아차림'의 훈련으로 마음 근육을 단련해 최종 순수의식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그것을 진아(眞我)의 상태라 했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마음의 목표로 삼고 있다.
살다 보면 명상을 방해하는 요소는 많다.
시기, 질투, 교만, 혈기, 병든 상태의 마음, 깊은 상처, 지나친 소유욕 등은 순수의식과의 교류를 방해한다.
마치 버그로 인해 컴퓨터가 먹통이 되는 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버그(bug)는 벌레라는 뜻이다. 벌레를 집어내야 컴퓨터가 작동되듯 이들 마음을 갉아먹는 버그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명상, 기도, 묵상, 정성 등을 드리며 수행하는 것이다. 이 모든 방해요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이들을 일시에 해결할 수 없기에 경지에 이를 때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불교의 8 정도에 동자(수행자)가 소(순수의식)를 만나러 산으로 간다. 많은 고비를 넘고 소를 만나고 나서 동자는 소를 탄 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거리 두기는 소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그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침묵은 경전(經典)이다
돌아오는 버스길은 위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24km 백석산 임도 도보가 끝났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이런 도보는 생활에서 계속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