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돈’이다. 퇴직 준비를 잘했거나 투자 운이 좋아 수익을 냈다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바로 ‘외로움’이다.
많은 퇴직자가 탑골 공원이나 인천 공항으로 간다. 그곳에는 또래 퇴직자들이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에 있는 동안에는 외로움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지만, 집에 오는 순간부터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곳도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닐 수 있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 있는 퇴직자도 탑골 공원 무료급식소를 이용한다는 언론 보도처럼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지 못하면 외로움은 해결하기 어렵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받는 퇴직자가 선택하는 잘못된 방법의 하나가 ‘불륜’이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는데, 불륜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뷔페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있어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한식, 일식, 중식과 양식 요리를 골라서 먹을 수 있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 배를 채운 후 집에 갈 때 일행이 “이 중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끼 먹는다면 무엇을 선택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고급 뷔페일수록 음식의 질이 높아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정말 마지막 한 끼를 할 정도로 인상 깊었던 음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뷔페와 달리 ‘특정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도 있다. 한식, 일식, 중식과 양식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요리를 만들어 팔거나 아니면 한식 중에서도 더욱 세분된 요리를 파는 음식점도 있다. 이런 음식점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음식보다는 음식의 질 혹은 음식의 깊이를 가지고 승부한다.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고 난 다음 뷔페에서와 같은 “이 중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끼 먹는다면 무엇을 선택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런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 중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직장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인간관계는 음식과도 같다. 어떤 사람은 뷔페 음식처럼 다양한 유형의 사람과 교류하면서 지낸다. 이런 사람은 다수의 사람과 폭넓게 교류하는 특성이 있다. 많은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조금이라도 만남을 소홀히 하면 관계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특정 요리 전문점처럼 소수의 사람과 깊이 있게 교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몇몇 사람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속사정까지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시간이 있었더라도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들 사이에는 충분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편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또한, 인간관계가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제 성향과는 달리 많은 사람과 교류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만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퇴직 후 몇 년간은 인간관계가 퇴직 전처럼 어느 정도 유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직장에서 일을 위해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 목적이 퇴직 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과만 계속 연락을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돈도 들고 시간도 든다. 퇴직자는 비록 시간은 많지만, 돈이 부족하고 기력도 딸리기 때문에 예전처럼 활발하게 사람들과의 교류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상대적으로 젊은 필자도 전화번호에 이름을 저장한 사람 중 기억이 나지 않은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퇴직 후의 삶에서 필요한 인간관계는 뷔페 음식이 아니라 전문 음식점에서 파는 아주 맛있는 음식이 더 적합할 수 있다. 퇴직 전 많은 사람과의 교류가 자신의 경쟁력이라고 여기던 사람일수록 퇴직 후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처음부터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 사람이라면 퇴직 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사람은 퇴직 후 그 사람들이 사라지는 순간 허전함과 쓸쓸함을 느끼면서 심한 경우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경쟁력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사람은 퇴직 후에도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면서 퇴직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헛되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다.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는 주고받는 이해관계가 사라지는 순간 관계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퇴직자가 경험하는 또 다른 외로움은 ‘집단’에서의 외로움이다. 퇴직 후 동호회나 커뮤니티 등에 가입해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때 느끼는 ‘집단에서의 외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외로움은 퇴직 초반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겪는 과정에서 느끼는 외로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외로움은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를 망설이게 만들어 새로운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험을 낳을 수 있다.
퇴직자에게 인간관계는 ‘풍요 속의 빈곤’ 일 수 있다. 이 말은 경제 용어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결핍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겉으로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작 진정한 소통이나 깊은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교류의 대상이 ‘마음’이 아니라 ‘상대의 겉모습이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뷔페에서 식사를 끝내면 배는 부르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과 만남은 머리로는 만족감을 느끼지만, 마음으로는 허전함이나 외로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관계의 깊이가 부족하거나 만남의 질이 깊지 않기 때문이다.
의논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거나 오롯이 혼자 대처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느낄 때 외로워진다. 이것은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자신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퇴직자가 간과하는 게 ‘가족과의 관계’이다. 일로 만난 사람이나 지인 혹은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과는 다르게 가족은 조건 없이 만나 애정과 존중, 공감과 인정을 주고받는 순수한 관계이다. 퇴직자 중에는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톨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가족과 애정과 공감을 나누는 가슴으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과 나누는 듯한 머리로만 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만 하는 대화는 상대와 연결되는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몸은 함께라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남성 퇴직자의 경우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가 서툴기 때문에 가족과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외롭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돈으로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 줄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퇴직자 중에는 외로움을 유흥업소에서 만난 이성으로 달래려는 사람도 있다. 퇴직자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진심을 다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돈을 보고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사람에 대한 실망감은 더 커지고 외로움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결국은 ‘가족’이다. 가장 탁월하고 효과 높은 퇴직 준비는 돈도 중요하지만,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퇴직자는 가족보다 지인이나 커뮤니티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이들은 ‘당연히 가족은 나를 이해하겠지’라는 엄청난 착각을 한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관심이 부족할 때 서운함이 더 클 수 있다. 따라서 퇴직자는 퇴직준비의 우선순위를 바꿔 가장 먼저 가족과의 관계부터 친밀하게 만들고, 다음에 지인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