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 트럼프의 노벨상 발언 문제점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박성진 문화평론


"트럼프의 노벨상

쟁취 발언''


〈트럼프의 노벨상의 오만〉



<서문>

문명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지금 ‘권력의 언어’가 인류의 언어를 압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도자들은 윤리를 말하지 않고, 언론은 품격보다 흥행을 좇는다.

그러나 철학과 문학은 여전히 그 허공을 향해 묻는다.

“이 거대한 소음 속에서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첫 장은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노벨상 요구’는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자기 풍자이며, 권력의 내면을 해부하는 심리학적 현상이다.

이 평론은 그 오만의 표정을 문명비평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세계와 한국이 무엇을 잃었는가를 성찰한다.




<트럼프의 권력 연극상을 향한 허영>


트럼프는 언제나 무대 위에 서 있다.

그에게 세계란 관객이며, 정치란 연극이다.

“기후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트럼프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을까 걱정된다는 그의 발언은,

그의 정치가 얼마나 ‘승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가를 보여준다.

그는 노벨상을 ‘도덕의 증표’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정당화할 상징적 트로피로 본다.

즉, 평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박수를 다시 듣고 싶어서 상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식 오만의 미학이다.

그의 세계관은 신념이 아니라 ‘관심’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전군 장교들을 불러 모은 권력의 제의>


트럼프는 수백 명의 미군 장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아 연설했다.

그 장면은 군사회의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 퍼포먼스였다.

트럼프는 군을 국가의 보호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 장치’로 삼는다.

노벨상이 자신을 외면할 때, 그는 장교들을 다시 불러 모으며

“이제 보라, 내가 미국이다”라는 메시지를 연출한다.

이는 위험한 징후다.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전락할 때, 그 징후는 언제나 ‘제의적 장면’으로 나타난다.

그는 신의 제단 위가 아니라, 자아의 제단 위에서 제사를 올리는 사제다.

이 장면은 권력의 미학이 인간의 불안을 어떻게 포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오만은 힘의 과잉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결핍의 고백이다.



<트럼프의 내면 ― 거만과 공허의 교차점>


그는 언제나 강하게 보이려 하지만, 그의 말투 속에는 불안이 숨어 있다.

트럼프의 ‘노벨상 집착’은 일종의 자기 구원 심리다.

그는 국가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재신화화를 원한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구호 뒤에는

“Make Me Great Again”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의 고전적 패턴이다.

거만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유머와 분노는 모두 상처받은 자존의 방어기제다.

트럼프의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정치도 이해할 수 없다.



<세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트럼프의 쇼는 세계 정치의 축소판이다.

이제 세계는 ‘이성의 정치’보다 ‘이미지의 정치’에 익숙해졌다.

노벨위원회가 그에게 상을 주지 않아도,

그는 이미 전 세계의 언론을 통해 관심의 상(賞)을 받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그를 비난하기보다,

그를 탄생시킨 구조를 성찰해야 한다.

그 구조란 자본의 불평등, 언론의 선정성, 민주주의 피로의 총체다.

트럼프는 그 구조의 부산물이다.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침묵 속의 품격과 제도 속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트럼프의 재등장은 곧 한반도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그가 다시 권력을 잡는다면, 그는 ‘평화의 중재자’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나 ‘거래의 평화’였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그 거래의 조연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오만 앞에 흔들리지 않는 자주적 외교,

미국의 감정이 아닌 가치 중심의 판단이 필요하다.

한국이 세계 속의 주체가 되려면,

정치보다 문명적 품격으로 응수해야 한다.

한국 언론과 지식인 사회 역시

그의 쇼를 소비하지 말고,

그 쇼를 가능케 한 세계의 병리학적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대응이다.



<트럼프와 툰베리, 세대와 문명의 충돌>


트럼프가 상을 요구할 때, 툰베리는 지구를 외친다.

그의 언어는 ‘권력의 소음’이고,

그녀의 언어는 ‘지구의 속삭임’이다.

이 둘의 대립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사적 대화다.

트럼프는 인간의 오만을,

툰베리는 인간의 회복을 상징한다.

그 사이에서 세계는 스스로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결론>

오만한 시대의 초상


트럼프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시대의 표정이다.

그의 오만은 인간의 거울이고,

그의 결핍은 문명의 피로를 비춘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조롱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노벨상 요구는

인류가 스스로에게 보낸 풍자다.

진정한 평화는 상(賞)에 있지 않고,

자기 성찰의 언어 속에 있다.”




<시적 후문 권력의 그림자>


> 그는 또 한 번 장교들을 불러 세운다.

권력의 제단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깃발이 흔들리면

남는 것은 오직 그의 그림자뿐이다.

상(賞)은 권력의 손이 아니라,

양심의 손에서 피어난다.

트럼프의 시대는 지나가도,

인간의 오만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는다.

그러므로 세계여, 눈을 감지 말라.

그대가 감는 순간, 또 다른 트럼프가 깨어날 것이다




박성진 총평


트럼프는 권력의 언어로 세계를 재현했고,

세계는 그 언어의 중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문명은 언제나 ‘성찰하는 지성’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 인문평론은 그 출발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오만을 해부하며,

문학이 권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이유를 증명한다.


> “권력은 순간의 박수로 끝나지만,

양심은 세기의 침묵 속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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