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박성진 인문평론
■
《트럼프의 노벨상과 문명의 반격》
***권력의 오만을 넘어, 양심의 눈으로***
<서문>
■
눈을 뜬 세계, 말하기 시작한 인간
트럼프의 “노벨상 발언”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문명 전체의 자화상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한 정치인의 허세가 아니다. 그것은 21세기 인간의 불안과 욕망이 만든 새로운 언어다.
그 언어는 국가의 외교를 흔들고, 언론의 헤드라인을 점령하며,
무의식 속 깊이 자리한 ‘힘의 언어’로 작동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트럼프가 아니다.
그를 만들어낸 세계의 침묵이다.
트럼프의 오만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영상을 끝까지 소비하고,
그의 행동을 혐오하면서도 클릭으로 보상하는 세계
그것이야말로 오만보다 더 깊은 문명의 병이다.
트럼프는 문명의 배우이고,
우리는 그 연극의 관객이자 작가였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우리 모두는 그 무대의 조명 아래 함께 서 있었다.
■
<트럼프의 언어 문명의 무의식이 말하다>
트럼프의 언어는 욕망의 언어다.
그의 단어들은 구체적 정치보다 상징적 심리를 말한다.
그의 문장은 간단하고, 짧고, 자극적이다.
그것은 이성의 언어가 아니라, 광고의 리듬이다.
트럼프 “노벨상”을 언급했을 때,
그 발언은 상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잊히지 않으려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었다.
그는 “기억의 결핍” 속에서 태어난 문명의 산물이다.
그의 언어는 자본주의의 언어,
즉 ‘보이는 것’만이 존재라고 믿는 시대의 거울이다.
그의 말은 오만이 아니라 불안이다.
그 불안은 오늘날 인류가 공유하는 감정이며,
그 감정의 근원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이다.
트럼프의 언어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그 언어가 왜 매혹적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의 말은 단순히 ‘막말’이 아니라,
‘문명이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목소리’다.
■
<세계의 무관심 오만의 공범들>
문명은 오만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즐긴다.
트럼프의 시대에 세계 언론은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헤드라인에 가장 크게 올렸다.
비판은 곧 홍보가 되었고,
혐오는 곧 클릭 수로 환산되었다.
이것이 현대 문명의 도덕적 모순 구조다.
언론은 비판의 언어를 쓰지만,
그 목적은 진실이 아니라 ‘관심’이다.
정치인은 정의를 말하지만,
그 계산은 ‘득표’에 맞춰진다.
이 모든 구조는 결국
‘오만의 시장’을 키운다.
우리가 그를 비난하면서도 지켜본 이유는
그가 우리 내면의 불안을 대리 표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시대의 무의식이 의인화된 존재”였다.
그의 발언이 거침없을수록,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자유롭다고 착각했다.
■
<자본주의의 무의식>
탐욕, 속도, 구독
트럼프를 키운 것은 정치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의 핵심은 세 가지
《탐욕, 속도, 구독》이다.
*탐욕이 이성을 대신한 자본주의.
부는 더 이상 윤리의 결과가 아니라, 능력의 증명으로 변했다.
돈은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했다.
*속도가 사유를 지배한 미디어 문명.
생각보다 먼저 클릭하고,
판단보다 먼저 전송하는 시대.
사유는 멈춤을 요구하지만,
현대는 멈춤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보다 구독 수를 우선시한 언론.
진실은 트래픽에 밀리고,
품격은 자극에 묻혔다.
언론이 진실보다 ‘흥행’을 택한 순간,
문명은 이미 방향을 잃었다.
이 세 가지가 트럼프의 등장을 가능케 한 문명의 토양이었다.
그를 욕하면서도 소비한 세계는
그 공모의 결과가 지금인 것을 확인한다.
■
<한국의 눈> 문명적 자주성의 회복
한국은 오랫동안 강대국의 언어에 반응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시선에 따라 웃고, 그들의 침묵에 따라 멈추었다.
트럼프의 시대는 그 종속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달라야 한다.
한국이 문명 속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철학적 주체성이다.
미국의 말을 따라가는 대신,
우리는 세계의 언어에 새로운 윤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은 분단의 상처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배웠고,
식민의 기억 속에서 자주를 익혔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오만 앞에서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은 ‘대응’이 아니라 ‘성찰’이다.
그의 말을 반박하기보다,
그의 불안을 이해하고 그 너머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 “트럼프는 권력의 시대를 대표하지만,
한국은 양심의 시대를 열 수 있다.”
■
<문명의 반격 오만을 넘는 인간의 품격>
트럼프의 오만은 세계의 병리지만,
그의 존재는 문명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여전히 인간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단 하나,
성찰의 복원이다.
문명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
권력의 연극은 끝난다.
한국은 그 길을 알고 있다.
조선의 유학은 ‘도의’를,
불교는 ‘자비’를,
독립운동은 ‘양심’을 가르쳤다.
그 모든 정신은 지금 이 시대의 윤리 자산이다.
트럼프의 언어가 힘의 논리라면,
한국의 언어는 기억의 논리다.
그 기억이 문명을 다시 일으킨다.
■
<트럼프와 툰베리 ― 두 문명의 대화>
트럼프가 권력의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 때,
툰베리는 연단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울음은 정치가 아니라,
지구의 양심이었다.
이 둘의 대립은 단순한 정치 구도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적 전환의 예고다.
트럼프가 말하는 ‘위대함’은
툰베리가 경고하는 ‘멸종’과 충돌한다.
트럼프는 오만의 상징,
툰베리는 침묵의 상징.
이 두 극단의 사이에서
한국은 어떤 언어로 세계에 말할 것인가?
그 답은 겸손, 슬픔, 품격에 있다.
한국은 그 셋을 모두 품고 있다.
전쟁의 슬픔을 기억했고,
평화의 겸손을 배웠으며,
역경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문명의 눈을 다시 뜨며>
트럼프는 지나가지만, 문명은 남는다.
그의 시대는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인류의 내면에 새겨진다.
우리가 다시 봐야 할 것은 ‘권력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다.
그 눈은 이성의 기억이며,
양심의 거울이다.
문명은 더 이상 강자의 무대가 아니다.
이제는 윤리의 연극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 무대 위에서 주연은 양심,
조연은 권력이다.
> “권력은 불안을 숨기기 위해 연극을 하고,
양심은 침묵 속에서 문명을 다시 쓴다.”
이제 문명은 오만의 언어를 버리고
성찰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트럼프의 시대가 막을 내릴 때,
양심의 시대는 막을 올린다.
인간의 눈이 깨어날 때
그는 깃발을 세우지만,
바람은 언제나 깃발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는 상을 원했지만,
인류는 이미 그 상을 잃었다.
그러나 어떤 침묵은 외침보다 강하다.
한 나라의 품격이 한 사람의 오만을
넘어설 때,
그때 세계는 비로소 눈을 뜬다.
■
문화평론가의 마무리는
윤리의 얼굴로 돌아가는 세계이다.
트럼프의 오만은 문명의 거울이다.
그러나 그 거울이 깨질 때,
비로소 새로운 얼굴이 비친다.
그 얼굴은 인간의 윤리,
즉 ‘품격 있는 문명’의 초상이다.
한국은 그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나라다.
분단의 고통을 통해 평화를 배웠고,
역사의 상처를 통해 양심을 얻었다.
문명은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기억으로, 양심으로,
그리고 조용한 인간의 품격은 지속된다.
트럼프의 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양심의 시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역사는 지켜볼 것이다.
힘으로 지배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